‘우리술 전문가’ 이수진 술펀 대표와 프리랜서 김도연 PD와 의기투합했다. 이른바 ‘주막특공대’. ‘취함을 존중한다’(취존)는 누구네 얘기처럼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취존 우리술을 찾아 떠난다. 증류식 소주부터 막걸리까지 맛있는 우리술이 있다면 전국 각지 어디든지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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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가 익는 양촌양조장에 들어서면 훤히 드러난 천장에 서까래가 보인다. 오랜 세월을 지나긴 했지만, 서까래에는 한자로 ‘昭和’(쇼와) 6년이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쓰여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지어진 건물이라는 의미다. 양촌양조장의 역사가 그대로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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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양조장 일을 거들며 막걸리와 친숙하게 지낸 이동중 대표는 대전에서 농대에 진학하고 학사장교를 제대한 이후 양조장에 들어왔다. 1978년 막걸리가 ‘국민의 술’이었던 때다.
이 대표는 “당시 정부에서는 논산시 각 읍면마다 양조장 1~2개를 둘 수 있도록 면허를 줬는데 면 단위 양조장에서 하루 판매하는 막걸리 양만 200말, 2000ℓ였다. 요즘 쓰는 통으로 계산하면 약 5300통”이라며 “농번기나 제사가 있는 때면 이도 모자라 난리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좋았던 시절도 잠시 1990년대 들어서면서 소주와 맥주가 보편화되자 막걸리는 설 자리를 잃었다. 200말이었던 판매량은 이후 150말, 100말로 줄었고 50말 턱걸이 할 때도 있었다.
이동중 대표는 “내리막길을 계속하다가 적자를 기록한 해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술이라는 특성이 있는 만큼 막걸리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버텨나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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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적중했다. 한집 건너 한집 양조장이 사라지던 막걸리 자유경쟁시대에 양촌양조장은 빠르게 성장했다. 현재는 논산 막걸리 시장의 70~80%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단 하나 이동중 대표의 고민은 후계자 양성이다. 1952년생인 이 대표의 나이는 올해로 66세다. 은퇴를 생각할 수도 있는 나이지만 아직 적절한 후계자를 찾지 못해 현역으로 뛰고 있다.
그는 “후계자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나도 장남이 아니다. 누구든지 관심 있는 사람이 하는게 옳다고 생각한다”면서 “후계자가 정해지면 제품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