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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 칼럼] 경로석은 벌써 만원이다

허영섭 기자I 2014.10.10 06:00:00
지하철의 경로석 풍경이 변한 것이 꽤 오래전부터다. 1993년 처음 경로석이 마련되고도 젊은이들이 수시로 침범하는 바람에 어르신들 꾸짖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지기 일쑤였으나 요즘은 어르신들끼리도 자리다툼이 보통이다. 노인들만 앉기에도 좌석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제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젊은이들은 그 주변에 얼씬도 못한다.

당연히 노인들끼리도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다, 어느 한때까지만 해도 무임승차가 인정되는 예순다섯이면 경로석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간주됐으나 지금은 어림도 없다. 적어도 일흔 후반 정도는 돼야 안심권이다. 그러고도 종종 주민등록증을 꺼내들고 시비가 벌어지기 마련이니, 경로석 제도가 도입되고 20년이 지나면서 바뀐 모습이다.

이미 우리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640만명으로 전체의 12%를 넘은 단계에서 2020년 15.7%, 2030년에는 24.3%로 늘어날 것이라 하니 경로석은 갈수록 비좁아질 것이 틀림없다. 더 나아가 2040년에는 그 비율이 32.3%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국민 세 명 가운데 한 명꼴로 65세 이상이리라는 얘기니 만큼 그때는 더 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생산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더욱 심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출산율이 꼴찌를 기록할 만큼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풍조 탓이다. 농촌 마을에서는 신생아 울음소리가 일찌감치 그쳐 버렸다. 학생들이 줄어들면서 폐교된 초등학교 교정에는 잡초만 무성하니 자라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2100년께 이르러선 젊은이들이 아예 사라지게 된다는 우려가 과장만은 아닌 것 같다. 서울에서도 동네 어린이집이 점차 경로당이나 노인 복지시설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인구경쟁력 약화를 경고하는 빨간불은 여기저기서 켜지고 있다. 저출산과 급격한 고령화 탓에 사회적인 부담이 늘어나고 경제활력은 뒤처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환갑을 넘긴 근로인구가 20대를 추월했다는 보도에 대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길거리에서 폐지를 주워 생계를 잇는 노인이 100만명을 넘는 가운데 고혈압과 당뇨, 신경증 등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노인들로 인해 진료비 부담이 늘어간다는 것도 고령화 시대의 그늘이다.

이런 식으로는 계속 버텨나갈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지원 대책이 지속가능한 것도 아니다. 올해 처음 노인들에 대한 기초연금제도가 도입돼 개인당 최대 20만원까지 지급되며, 3~5세 취학 전 아동들에게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비용으로 22만원씩 일률 지원되고 있으나 벌써부터 파열음이 들려오는 상황이다. 자지체와 시·도교육청은 이로 인해 재정이 바닥났다며 어려움을 호소한다.

기초연금이 노인 생계비 지원을 위한 것이라면 아동 보육료 지원은 혼령기 세대의 결혼 기피증을 해소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마땅한 재원도 없이 의욕을 너무 앞세웠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더구나 한 번 도입된 복지정책을 후퇴시키기란 여간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결국 정책표류 과정에서 정부 불신은 깊어지고 사회적인 혼란만 가중시키게 될 뿐이다.

노인들에 대한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도 마찬가지다. 이젠 누가 먼저 폐지하자고 말을 꺼내기가 어렵게 돼버렸다. 아직은 괜찮을지 몰라도 젊은 유료 승객들이 갈수록 노인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결국은 ‘공짜 지하철’이 되고 말 것이다. 지하철 좌석을 점령한 노인들이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래를 부르며 질주하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찜찜하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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