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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전 5대 부국 아르헨은 어떻게 몰락했나

김정남 기자I 2019.12.25 06:04:10

페르난데스 대통령 "사실상 디폴트 상황"
선진국서 후진국으로 몰락한 유일한 나라
70년간 이어진 복지 포퓰리즘 '페론주의'
무상복지 확대, 급격한 임금인상 후유증
실업 급증·물가 폭등·재정 악화·금융 불안

[그래픽=이데일리 이동훈 기자]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세계에는 네 가지 유형의 국가가 있습니다. 선진국과 후진국, 그리고 일본과 아르헨티나입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발전론의 석학 사이먼 쿠즈네츠(1901~1985) 전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이같은 말을 남겼다. 쿠즈네츠 교수 생전에 일본은 드라마 같은 성장을 이뤄냈다. 소니 워크맨과 도요타 캠리가 그 상징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 세기도 안 돼 선진국 반열에 오른 유일한 나라가 일본이다.

아르헨티나는 정반대의 경우다. 100여년 전인 1900년대 초반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5대 부국’으로 불렸다. 비옥한 초원 팜파스에서 나는 농축산물을 수출해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한국의 일제 식민지 초기인 1913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지하철이 다녔다. 이랬던 아르헨티나가 무너진 게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다. 쿠즈네츠 교수가 경제학자로 이름을 날릴 때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미끄러진 유일한 나라가 아르헨티나다. 국내의 한 경제학 교수는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학계의 연구대상”이라고 했다.

◇아르헨 대통령 “디폴트 빠졌다”

아르헨티나가 또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하면서 70년 넘게 이어진 경제 몰락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지금껏 20번 넘게 구제금융을 받았지만 아직 빚도 갚지 못할 정도로 경제 자생력이 떨어진다. ‘페론주의’로 일컬어지는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이 낳은 실패를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지난 22일 밤(현지시간) 현지 아메리카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디폴트(virtual default) 상황에 빠져 있다”고 밝혔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국가부도 선언과 다르지 않다.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570억달러(66조원)의 구제금융에 합의했다. IMF 역사상 최대 규모다. 좌파 성향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지난 10일 취임 이후 빚을 갚겠다는 의지를 밝혀왔으나, 불과 열흘여 만에 단기부채 상환을 하지 못하는 난국을 맞이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그러면서 “2001년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2001년 디폴트를 선언했던 적이 있다. 경제난에 지친 국민이 폭발해 약탈과 방화 등 소요가 발생했고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던 때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당시에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며 “실업률도 큰 문제”라고 토로했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위기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7.6%에 달했다. 2014년 이후 매해 38.4%→24.0%→42.4%→24.8%→47.6%를 기록했다. 물가가 극단적으로 폭등하면 소비는 마비된다. 통상 주요국의 적정 물가상승률 목표치는 2.0%다. 실업률도 지난해 9.5%까지 치솟았고 올해는 10%를 넘고 있다. 한국의 실업률은 3% 중반대다. 이뿐만 아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비율은 마이너스(-)로 고꾸라지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5.2%를 기록했다. 그만큼 대외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국내 한 금융권 고위인사는 “세계 경제가 흔들릴 때 아르헨티나 페소화가 유독 폭락하는 것도 경제 체력이 너무 떨어지는 탓”이라고 했다.

◇포퓰리즘 탓 70년간 이어진 몰락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이번 디폴트를 두고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이 시한폭탄을 넘겨준 것”이라고 전임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마크리 전 대통령은 우파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몰락은 특정 정권에 책임을 물을 정도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평가가 대다수다. ‘아르헨티나 병(病)’으로 불리는 포퓰리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 원조는 70년이 넘는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후안 페론 대통령은 급격한 임금 인상과 무상 복지 확대에 나섰다. 1947년 시간당 실질임금이 25% 인상됐을 정도다. 국유화도 페론주의의 트레이드마크다. 그 결과는 당장 경상수지 적자로 나타났고 이후 아르헨티나는 ‘IMF 단골손님’으로 전락했다. IMF 등에 따르면 아르헨티나는 1958년 이후 22번, 즉 3년에 한 번꼴로 구제금융을 받았다. 20여년 전 한국의 외환위기가 70여년 내내 이어졌다고 보면 된다.

OECD 분석을 보면 이는 명확하다. 1951년 이후 아르헨티나의 성장률은 수시로 마이너스의 늪에 빠졌다. OECD는 “성장세가 계속 불안정했다(Growth has been volatile)”고 평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페론주의를 신봉하는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불안한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재정을 강조하고 있어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정부는 부족한 정부 재원을 확충하기 위한 증세안 등을 담은 긴급 법안을 최근 처리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재정·통화 상황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지난해 중앙정부 부채 비율은 GDP 대비 76.1%까지 상승했고 올해는 80%를 넘었다. 물가 폭등도 복지에 쓸 돈을 새로 찍어내면서 통화정책에 실패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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