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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호의 그림&스토리]<13>'BTS' 이전에 '무동'이 있었다

오현주 기자I 2021.05.07 03:30:00

▲김홍도 '무동' 신윤복 '쌍검대무'로 본 한국인의 흥
조선 대표 풍속화가가 그린 조선 아이돌 춤사위
예부터 내려온 '흥 DNA'…K팝 한류로 꽃피워내
백범 김구가 소망한 '높은 문화의 힘' 널리 떨쳐

단원 김홍도가 그린 ‘무동’(18세기 말). 풍속화 25점을 묶은 ‘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7호)에 실렸다. 현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생생한 표현력이 도드라진다. 공 들여 그리지 않고, 강하고 빠른 선으로 장면에 가장 어울리는 최소한의 묘사와 채색을 한 김홍도만의 독특한 화풍이 살아 있다. ‘춤추는 아이’를 기준으로 악사들을 돌려 앉힌 원형구도는 춤과 음악이 한 데 어우러지고 있는 순간을 효과적으로 잡아낸 주요한 장치가 되고 있다. 종이에 수묵담채, 27×22.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최근 한국인을 공분케 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김치와 한복을 자기네 문화의 일부라고 주장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주장에 개인만이 아닌 중국 언론과 외교관까지 나선 것이 알려지며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선 치밀한 공정임이 드러났습니다. 사실 이 같은 억지주장에는 한류로 총칭되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국제적 인기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깔려 있습니다. 김치와 한복뿐 아니라 K드라마, K영화, K푸드 등 우리 문화 전반이 세계에 두각을 나타내자 위기의식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한류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며 중국이 아무리 왜곡을 해도 한류가 세계 유행을 주도하는 시대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한류의 선봉에는 K팝으로 불리는 대중음악이 있습니다. BTS와 블랙핑크의 뮤직비디오는 연일 유튜브 조회 수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성공에는 ‘춤’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멋지고 창의적인 동작, 칼군무, 또 춤을 추면서 완벽하게 부르는 노래 등 우리 아이돌 실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들의 춤을 보면서 떠오르는 그림이 한 점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1745∼1806?)가 그린 ‘무동’(舞童)입니다.

북·장구·대금·해금·피리 2…전통 삼현육각과 춤

원형으로 배치된 인물들이 먼저 보입니다. 악사는 북·장구·대금·해금에 피리가 둘, 이렇게 여섯으로 국악의 전통 악기편성법인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제대로 갖췄습니다. 북을 치는 악사는 왼쪽 무릎을 꿇고 북을 치면서도 다른 악기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눈은 대금과 해금 연주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장구를 치는 악사는 흥이 올랐는지 장구를 바닥이 아닌 무릎 위로 바짝 끌어올려 치고 있습니다.

피리는 두 사람인데,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이도 보이고, 피리를 옆으로 뉘어 불고 있는 이도 보입니다. 전통피리는 ‘혀’(관악기에 장치하는 리드)를 관대에 끼워 사용하며 관이 작은 세피리를 불 때는 볼이 빵빵해지곤 합니다. 또 피리를 불다 보면 입술이 아파 옆으로 불기도 한다니 둘 중 왼쪽 악사가 딱 그런 모습입니다. 대금을 부는 악사는 보통 대금을 오른쪽으로 잡는 것과 반대여서 아마 왼손잡이가 아닐까 합니다. 해금 연주자는 왼손으로 줄을 감싸 안아야 하는데 손등이 보여 실수처럼 보이지만 이는 김홍도의 풍속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단원 식 조크’로 이해됩니다. 이들 중 도포에 갓을 쓴 세 명은 ‘장악원’ 소속으로, 군졸 모자인 벙거지를 쓴 세 명은 군대의 ‘세악수’ 소속으로 보입니다. 모두 흥이 올라 연주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이제 춤추는 주인공을 한 번 볼까요. 동그란 얼굴에 수염이 없어 10대 소년으로 보입니다. 왼발로 지면을 박차면서 오른발을 번쩍 치켜들며 발끝은 위로 향했는데, 눈에 확 띄는 건 빨간색 신발입니다. 두 팔은 오른편으로 휘젓는 중이고 그중 왼팔을 머리위로 넘겼습니다. 팔의 회전으로 옷이 접히면서도 춤사위가 소매 끝까지 이어져 몸짓은 더욱 크고 화려해 보입니다. 왼발 끝부터 소매 끝자락까지 흥을 입은 소년은 노랫가락에 완전히 몰입한 모습입니다. 춤이 만족스러운지 입가에는 미소가 번집니다. ‘춤추는 아이’란 뜻의 무동은 조선시대의 ‘아이돌’입니다. 평범한 아이돌도 아닙니다. 흥과 기량이 탁월해, 가히 ‘조선시대의 BTS’라 불릴 만합니다.

이런 흥분 속에서도 김홍도는 허리띠를 소매와 반대 방향으로 날리며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악사들의 옷은 변화 없이 일정한 굵기로 묘사한 데 비해 무동의 옷은 팔꿈치나 손목 등 꺾이는 부분을 더 굵고 속도감 있게 표현한 것도 특징입니다. 굵기에 변화를 주며 속도감 있는 선을 사용하면 춤사위가 더욱 역동적으로 보이니, 김홍도의 탁월한 감각이 만들어낸 효과인 것입니다. 특별한 효과는 더 있습니다. 무동의 옷에 가장 진한 색을 쓴 것, 모두를 앉혀 놓고 무동만 세워둔 것 등입니다. 무동에게 시선이 모이는 원형구도를 만들어두고 신명나는 음악을 상상하며 춤사위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혜원 신윤복의 ‘쌍검대무’(18세기 말∼19세기 초). 조선후기 소비생활과 유흥문화를 즐긴 상류층의 풍류를 묘사해, 30점을 한 권으로 엮은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에 실렸다. 가늘고 유연한 선, 산뜻하고 또렷한 색, 현대적인 구도와 독특한 상황 설정으로 조선 풍속화의 영역을 다채롭게 넓혔다고 평가받는다. 종이에 수묵채색, 28.2×35.6㎝, 간송미술관 소장.


악기연주에도 일가견 있던 김홍도…공연 관람 즐긴 신윤복

그림에는 배경도 없고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도 없습니다. 단원은 이 공연이 누구를 위한 건지 관심도 없고 오직 악사와 무동의 음악과 춤을 부각하려 했습니다. 이렇게 김홍도가 붓질만으로 소리와 영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매우 뛰어난 악기연주가였기 때문입니다. 조선후기 문인이자 화가였던 강세황(1713∼1791)이 쓴 이런 회고가 보입니다. “김홍도는 일면으로 음악에 통하여 거문고와 피리가 매우 절묘하였고 풍류가 호탕하여 칼을 치면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생각을 가지고 더러는 비장하게 눈물을 흘리는 적도 있었다”(강세황 ‘단원기우일본 檀園記又一本’ 중에서).

춤추는 장면을 그린 조선시대 회화 중 ‘무동’에 버금가는 또 한 작품이 있습니다. 혜원 신윤복(1758∼?) 의 ‘쌍검대무’(雙劍對舞)입니다. 신윤복은 김홍도·김득신과 함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조선시대 풍속화가입니다. 서민층을 주로 조명했던 김홍도와는 달리 양반층의 풍류와 남녀 간 연애, 기녀와 기방의 세계 등을 도시적 감각과 해학으로 펼쳐 보였습니다.

그림은 가운데에 두 명의 무희를 두고 위로는 관객, 아래로는 악사를 배치했습니다. 가운데 왼쪽으로, 테두리가 있는 고급스러운 돗자리를 깔고 등받이에 기대앉은 인물이 이 행사의 주인공입니다. 패도를 차고 손에는 쥘부채를 들고 있는데 무희의 춤이 클라이맥스에 올랐는지 기댄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런 규모로 악사와 기녀들을 동원할 정도면 꽤 높은 권세가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위쪽 기생이 든 장죽도, 왼쪽 무희의 칼도 그를 향해 있어 그림에서 무희를 제외하면 가장 시선이 모이는 인물입니다.

그 인물 곁에 무릎을 팔로 모으고 앉은 사람은 비서격인 책실(冊室)로 보입니다. 그 위로 수염이 없는 앳된 청년은 아마 주인집 아들 같은데 이런 행사가 조금 못마땅한지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가채머리를 한 기생들 옆에 초립을 쓴 사내는 무희들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그림 아래쪽에선 ‘무동’에서 봤던 삼현육각이 보입니다. 복장으로 봐 악사들은 장악원 소속 예인인 듯합니다. 왼쪽 끝 인물만 특이한데 악기 없이 차면(遮面)이란 얼굴가리개만 들고 있습니다. 음악교육이나 춤·연주를 담당했던 관리로 생각됩니다.

지체 높은 양반과 관료들이 있지만 그림의 주인공은 역시 무희입니다. 공작 깃을 단 전립을 쓰고 군복인 동달이를 입은 채 양손에 칼을 들고 짝을 이뤄 춤추고 있습니다. 발 모양과 옷 날리는 모양으로 보면, 서로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왼쪽으로 몸을 돌려 자세를 잡는 모습입니다. 신윤복은 무희들이 칼을 휘두르며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는 그 순간을 사진 찍듯 묘사했습니다. 다른 인물은 채도를 낮추고 무희만 밝고 선명한 청색과 붉은색을 대조시켜 화려함과 박진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 해도 이런 공연을 많이 접해보지 못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묘사입니다.

‘무동과 무희’. 김홍도가 그린 ‘무동’ 중 춤추는 아이(왼쪽)와 신윤복이 그린 ‘쌍검대무’ 중 춤추는 기생(검무기)을 클로즈업했다. 강하고 빠른 선을 구사한 김홍도와 가늘고 유연한 선을 구사한 신윤복의 대조적인 화법이 한눈에 들어온다. 엷은 갈색으로 최소한의 색만 쓴 김홍도에 비해 신윤복은 빨갛고 노랗고 파란 원색을 즐겨 썼다.


정약용 박제가도 감탄한 검무

칼을 들고 추는 춤을 검무라 하고 이 검무를 추는 기생을 검무기(劍舞妓)라 합니다. 당시 검무에 대해선 고지식한 유학자들도 여러 글을 통해 감동을 전했습니다. 박제가는 ‘검무기’, 유득공은 ‘검무부’, 정약용은 ‘무검편증미인’ 등을 통해 검무의 동작을 소개하고 검무가 얼마나 인기가 있고 검무기의 춤 실력이 출중했는지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경남 진주검무는 궁중행사에 오를 만큼 뛰어난 춤으로 유명했는데 8명이 그룹을 이룬, 말 그대로 ‘칼군무’였습니다. 이런 박진감 넘치는 검무의 DNA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K팝 아이돌의 칼군무가 세계 팬을 매료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요. K팝의 승승장구는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래방이 있는 나라로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은 ‘백범일지’의 말미에 붙인 ‘나의 소원’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 했습니다. ‘높은 문화의 힘’, 그 시작은 분명 원래 가지고 있던 우리 문화를 잘 이해하는 것부터일 겁니다. ‘무동’과 ‘쌍검대무’는 바로 그 출발점입니다.

△손태호 미술평론가는…

30대 중반 도망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살이가 버겁고 고달파서. 막막하던 그 시절, 늘 그렇듯 삶의 퍼즐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풀렸다. 그즈음 눈에 띈 옛 그림이 우연이었고 그 흔적을 좇아 미술관·고서화점 등을 누비고 다닌 게 필연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찍힌 인장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을 보고 어째서 ‘그림이 삶, 삶이 그림’이라 하는지 깨달았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도의 길은 그날로 접혔다. 동국대 대학원 미술학과로 진학해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미술 전문가가 됐다. 조선회화·불교미술에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스민 상징 같은 ‘옛 그림’은 거울로 곁에 뒀다. 지금은 한국문화예술조형연구소 학술이사로 있으면서 이론·현장을 연결한 연구, 인물·지리·역사를 융합한 글과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불상의 탄생’(한국학술정보·2020), ‘다시 활시위를 당기다’(아트북스·2017), ‘나를 세우는 옛 그림’(아트북스·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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