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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관리 백팔수(百八手): 86편] 매뉴얼은 수명이 6개월이다

김보영 기자I 2019.06.27 00:10:00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 위기가 발생하면 일단 기업 내부에서는 어떻게 현 상황을 해석해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급히 경영진이 소집되고, 현 상황을 브리핑하는 직원들이 동분서주한다. 일상 업무는 대부분 중지되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상황에 대응하느냐 많은 직원들이 고생하게 된다.

이런 내부 분위기와 달리, 언론을 비롯한 외부 이해관계자들은 현 상황에서 위기를 관리하는 회사의 임직원이 책상 위에 위기관리 매뉴얼을 펼쳐 놓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 하게 움직일 것이라는 상상을 한다. 위기관리 매뉴얼에는 위기 시 임직원들이 따라야 하는 일 거수 일 투족이 모두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위기관리에 일부 문제가 보이면, 그 회사 임직원들이 제대로 매뉴얼을 준수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한다.

실제 이런 상황과 시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업은 종종 위기관리 이후 비슷한 비판을 받게 된다. “위기관리 매뉴얼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아 위기관리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그 중 하나다. “(그 회사에는) 활용할 수 있는 위기관리 매뉴얼도 없었다”는 지적을 할 때도 있다. 마치 위기관리 매뉴얼만 제대로 존재하고, 그를 준수했다면 위기관리가 좀 더 잘 되었을 것이라는 전제 같다.

그러나, 위기관리 매뉴얼은 현장에서 그리 큰 의미나 활용도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현장에서 위기관리 매뉴얼을 한 장 한 장 읽어 가며 위기를 관리하는 기업이나 기관은 없다. 실제로 그래서도 안된다. 위기관리 매뉴얼은 위기관리 조직의 머릿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이 매뉴얼을 돌아가며 읽고 있는 위기관리조직이라면 일단 위기관리는 저 멀리 물 건너간 경우다.

그렇다면 기업이나 기관들은 왜 위기관리 매뉴얼을 보유하는 것일까? 언론이나 주요 이해관계자들은 그 들에게 왜 위기관리 매뉴얼을 보유하고 준수하라 이야기하는 것일까? 위기관리 매뉴얼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들이 생길 것이다.

위기관리 매뉴얼의 수명은 기껏 6개월 안팎이다. 실제 수명을 재본 것이 아니니 이론화 할 수는 없지만, 기업 조직변화와 인사이동, 주요 임직원들의 입사와 퇴사 등의 환경을 감안하면 일단 위기관리 매뉴얼의 상당 부분은 지속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새로 변화된 구성원들이 새 포지션에서 임무를 시작할 때도 위기관리 매뉴얼에 대한 고지나 학습은 제때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자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인지가 없을 뿐 아니라, 매뉴얼에 정해져 있는 위기관리 프로세스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일정 기간이 흐른다.

종이로 된 매뉴얼은 수 백 년 넘게 존재 가능하다. 그러나, 매뉴얼을 실제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유구하지 못하다. 위기관리 매뉴얼의 수명을 6개월로 보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게 짧은 수명의 위기관리 매뉴얼의 존재 이유와 가치는 그 매뉴얼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기업 내 위기관리 조직 구성원들을 지정하고, 그들이 스스로 모여 위기관리 매뉴얼을 정리해 보는 그 과정이 바로 위기관리 체계로 굳어진다. 그 과정에서 위기관리 조직 구성원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이해한다.

위기관리 체계를 함께 만들어 나가면서 각자가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미리 찾아 갖추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위기관리 체계의 큰 그림이 완성이 된다. 위기관리 매뉴얼은 그 그림을 그대로 담아 놓은 기록물일 뿐이다.

언론을 비롯한 외부 이해관계자들도 위기관리 매뉴얼 자체가 위기관리를 위한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좀 더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적을 하려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위기관리 매뉴얼을 기업이 평소 얼마나 학습했고, 그에 따라 훈련과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는지를 좀 더 살펴야 한다. 종이로 된 두꺼운 위기관리 매뉴얼이 현 상황에서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사내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죽은 위기관리 매뉴얼로는 어떤 위기도 관리할 수 없다. 위기관리 체계나 역량 같은 영혼이 위기관리 매뉴얼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당히 많은 기업이나 기관들이 위기관리 매뉴얼을 심리적 위안으로 만들어 책장에만 보관한다. 매뉴얼을 만든 이후 누구도 그 책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말 그대로 매뉴얼이 죽는 것이다.

매뉴얼의 수명을 늘리고, 살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위기관리 조직을 대상으로 하는 정기적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주요 위기관리주체들은 실제 상황을 설정해 시뮬레이션 해 보면서 위기관리 매뉴얼에 활기를 주어야 한다. 이런 노력들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위기관리 매뉴얼은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 지금이라도 자사의 위기관리 매뉴얼이 살아있는지 확인해 보자. 위기가 닥쳤을 때 펼쳐 봤 자 아무 소용없으니 말이다.

◇필자 정용민은 누구?

정용민은 국내 최초로 설립된 위기관리 전문 컨설팅사 스트래티지샐러드의 대표 컨설턴트다. 200여 이상의 국내 대기업 및 유명 중견기업 클라이언트들에게 지난 20년간 위기관리 컨설팅과 코칭, 자문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기업 위기관리 전문서적 [소셜미디어시대의 위기관리], [기업위기, 시스템으로 이겨라], [1%, 원퍼센트], [기업의 입]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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