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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의 樂카페]K팝도 '라디오스타' 꿈꿔라

김현식 기자I 2023.03.20 05:30:00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사진=이데일리DB)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깃발’, ‘행복’의 시인 유치환은 자작 수필 ‘나는 고독하지 않다’에서 라디오가 제공하는 경이를 이렇게 묘사했다. “겹겹이 벽이 가로 질러있고 문이 꼭꼭 닫혀진 방 안에서도 수만리 바깥 원격한 말소리며 노래를 손에 쥐듯 듣다니 얼마나 귀신같은 신비스런 노릇인가.” 저 옛날 TV가 등장하기 전 라디오는 정말 놀라운 매체였다.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드라마, 뉴스 그리고 음악을 듣기 위해 라디오를 보유한 집에 몰려들었다.

얼마 전 작고한 국내 최초의 디스크자키 최동욱이 1960년대 말 ‘탑튠쇼’를 진행할 때 그의 인기는 신성일보다 우위였고 1990년대 중반까지도 인기 라디오 프로는 같은 시간대 시사교양 TV프로 시청률을 압도할 정도였다. 영화배우를 빼고 유명연예인은 곧 ‘라디오스타’였다.

대중음악 역사는 라디오와 궤를 함께한다. 1920년대 미국에 라디오방송국이 생겨나면서 근대적인 의미의 대중음악이 부상했다. 특히 스테레오가 가능한 FM라디오, 즉 음악전문채널이 1960년대 말 미국, 1970년대 말 한국에서 보편화하면서 라디오는 곧 음악이라는 등식이 확립됐다.

어떤 면에서 베이비붐세대는 라디오가 맺어준 ‘상상공동체’이며 라디오에 대한 깊은 정서적 헌신이 두드러진 세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라디오의 정체성은 이처럼 아무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과 나를 연결해주는 매체, 기이한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는 매체라는 점에 있다.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음악청취 행태에 관련해 라디오와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아이팟이 말해주는 ‘나만의 라디오’,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모은 이른바 ‘나의 플레이리스트’로 중심이 바뀌었다. 멜론, 지니 등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사이트들도 이 부분을 강조한다.

특정 팬덤이 위력을 발하면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의 파괴력은 갈수록 하락세를 보인다. 물론 라디오와 팟캐스트, 오디오 콘텐츠의 미래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2000년대부터 음악보다는 시사와 토크가 라디오의 헤게모니를 쥐면서 음악 매체로서 라디오가 선두라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라디오 종사자들부터 음악프로는 청취율이 낮다고 한숨을 쉰다.

무엇보다 지금은 유튜브와 OTT가 웅변하듯 소리 아닌 ‘영상’ 시대다.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라디오는 왠지 따분하다. ‘비디오는 라디오스타를 죽였다’는 노래제목은 1979년에는 맞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세계화로 내달리고 있는 K팝도 라디오와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있다. 화려한 댄스 퍼포먼스와 빼어난 패션과 비주얼을 내세운 K팝은 기본적으로 영상이 우월하게 작용한다. 듣는 쪽보다는 보이는 쪽이 성패를 가른다.

어느덧 아시아와 세계 시장에 등장한 지 20년이 넘어가면서 K팝도 지속가능성과 관련해 중요한 전환점을 맞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그룹 퍼포먼스에 맞춘 후크, 일렉트로닉 리듬양식의 반복은 물림증을 초래할 수도 있다. 새로움을 수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각보다는 감동을 우선시하고, 퍼포먼스 속에서도 음악성을 놓치지 않는 예술적 분위기가 조성돼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많은 음악 프로듀서들이 “라디오가 살아나야 K팝이 롱런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다양성’이 작동해야 여러 스타일의 음악을 누릴 수 있는데, 그것을 라디오가 음악 매체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고 다수가 청취함으로써 음악예술성이 전면 부활하는 단계로 가야한다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지금 단계에선 확실히 ‘듣는 음악’이 필요하다. K팝이 영상만이 아니라 라디오에도 흘러나오고 이를 청취자가 응원하는 게 안 되면 힘들어진다. 참고로 지상파 라디오의 위세가 강한 나라는 각국의 비교통계는 없지만 디지털 라디오로의 전환이 빨랐던 청취율 90%의 영국과 역시 2019년 12세 이상의 국민 89%가 라디오를 들었다는 미국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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