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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려놓으니 '그림'이 되더라

오현주 기자I 2018.10.08 00:12:00

원주 산기슭 뮤지엄산 5주년 맞아
중견미술가 10인 회화·영상 등으로
'자연·사색·치유' 등 콘셉트 연결한
기획전 '풍경에서 명상으로' 꾸려
소장품 엄선해 산수화 계보 더듬은
'한국미술의 산책 Ⅳ: 산수화' 전도

강원 원주시 뮤지엄산 개관 5주년 ‘풍경에서 명상으로’ 전에 마주 걸린 김선형의 ‘가든 블루’(2018·위) 연작과 강종열의 ‘동백숲을 거닐다’(2015∼2016), ‘하얀 눈과 동백나무’(2016) 연작. 김 작가가 면포 가득 흘러내리는 녹죽을 채워 ‘낮에 보이는 대나무’와 ‘밤에 보이는 대나무’를 구분했다면, 강 작가는 파노라마처럼 끝없이 연결된 동백나무 군락을 형성했다. 각자의 두 작품을 합쳐 각각 854㎝와 1622㎝의 광활한 장면을 연출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원주=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2013년 5월. 강원 원주시 해발 275m 산기슭에 그림 같은 건물이 들어섰다. 자작나무숲 너머로 아늑하게 내려앉은 콘크리트덩이, 물과 빛·어둠이 어우러진 기하학적 구조.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77)가 8년여를 매달렸다는 그 공간은 ‘미술관’이었다. 자연과 콘크리트의 절묘한 조화를 꾀하며 사색을 ‘강요하는’ 안도의 철학을 온전히 박아냈다. 대지 7만 1172㎡(약 2만 1530평), 전시장 5445㎡(약 1650평) 규모. 종종거리며 한 바퀴 둘러보는 길이만 2㎞를 넘긴다니 왜 아니겠나. 단연 화제가 됐다. “산중 미술관이라니, 제대로 운영이 되겠느냐”는 현실적인 우려와 “이런 장소 한 곳쯤 생길 때가 됐다”는 이상적인 환대가 교차했다. 시작은 한솔뮤지엄, 이듬해부턴 뮤지엄산이라 불리고 있는 그곳 얘기다. 그렇게 미술관을 휘두른 산줄기에 꽃이 피었다 지기를, 단풍이 들었다 떨어지기를 다섯 차례. 뮤지엄산이 개관 5주년을 맞았다.

강원 원주시 뮤지엄산 전경.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8년여를 매달려 2013년 5월에 완성, 개관한 뒤 5주년을 맞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가 10인이 풀어둔 ‘사색 만든 풍경’

세상살이의 번잡함을 다 버려야 하는 그곳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해 뜨고 지고 바람 불다 멎어 비가 되는, 자연의 속도에 순응하면 그렇게 된다. 그 자체가 이미 거대한 풍경인 거다. 뮤지엄산이 개관 5주년을 기념한 기획전 ‘풍경에서 명상으로’의 콘셉트가 바로 그것이다. 풍경이 작품이 되고 그 안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명상의 순간을 잡아내는. 이번 만큼은 ‘같이’보단 ‘혼자’란다. 소통을 위한 단절이 어떠냐는 제안이다.

국내 중견미술가 10인이 동참했다. 전시는 강종열·김선형·김승영·김일권·박능생·오명희·육근병·이해민선·정석희·한지석 등 내로라하는 10인의 굵직굵직한 회화와 영상설치·오브제 13점으로 구성했다. 바라보는 시선과 묘사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이들 작품의 결은 한 가지다. 자연을 모티프로 오감을 자극해 깊이 있는 사색을 유도한다는 거다. 현대적으로 해석한 풍경을 화폭에 올리고, 사각프레임에 가둔 영상회화도 시도했다. 나무[木], 숲[林], 산[森]으로 방을 나눈 뒤 눈높이를 맞춘 작품을 묶었는데, 특히 마음을 쓴 건 배치다. 둘씩 한 쌍으로 마주보게 해 공간을 감도는 특별한 기운을 느껴보라 한 거다.

오명희의 ‘빛나는 생의 중심’(Radiant Center of Life·2016∼2017)과 조우한 작품은 한지석의 ‘깊은 주의’(2017)다. 오 작가가 682㎝ 길이의 화면에 능수매화 한그루를 세우고 휘날리는 스카프 한 장으로 바람까지 잡아냈다면, 한 작가는 미동도 하지 않는 축 가라앉은 산을 붙들었다. 울트라마린블루가 뚝뚝 떨어지는 어두운 화면에 빛 하나 찍어 어렴풋한 형상을 가늠케 한 거다.

오명희의 ‘빛나는 생의 중심’(2016∼2017). 682㎝ 길이의 화면에 능수매화 한그루를 중앙에 세우고 오른편으로 휘날리는 스카프 한 장으로 바람까지 잡아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한지석의 ‘깊은 주의’(2017). 미동도 하지 않는 축 가라앉은 산을 붙들었다. 울트라마린블루가 뚝뚝 떨어지는 어두운 화면에 빛 하나 찍어 어렴풋한 형상을 가늠케 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김선형의 ‘가든 블루’(2018) 두 점은 강종열의 ‘동백숲을 거닐다’(Camellia·2015∼2016), ‘하얀 눈과 동백나무’(White Eye & Camellia·2016)를 만났다. 김 작가가 대나무라면 강 작가는 동백이다. 각자의 두 작품을 합쳐 각각 854㎝와 1622㎝의 광활한 장면을 연출한다. 김 작가가 면포 가득 흘러내리는 녹죽을 채워 ‘낮에 보이는 대나무’와 ‘밤에 보이는 대나무’를 구분했다면, 강 작가는 파노라마처럼 끝없이 연결된 동백나무 군락을 형성했다.

타오를 듯 뻗쳐오른 붉은 공간도 있다. 이해민선의 ‘육지는 금방 차가워졌고’(2012)와 박능생의 ‘붉은 산(경복궁)’(2016∼2017)이 그것. 이 작가가 개발이란 미명 아래 붉게 산화한 이 땅의 신음을 들어줬다면, 박 작가는 붉게 솟은 산 아래 희끗한 도시전경을 엇박자 없이 평화롭게 조화시키려 했다.

이해민선의 ‘육지는 금방 차가워졌고’(2012). 공사현장인 양 붉게 산화한 땅 위에 홀로 꽂힌 나무토막의 외로움을 전한다(사진=뮤지엄산).
박능생의 ‘붉은 산(경복궁)’(2016∼2017). 붉게 솟은 산 아래 희끗한 도시전경을 엇박자 없이 평화롭게 조화시키려 했다(사진=뮤지엄산).


영상회화를 표방한 두 점도 있다. 육근병의 ‘낫싱: 창과 커튼’(2012)과 김승영의 ‘구름’(2018)이다. 어느 날 새벽, 양평 작업실에 드리운 하얀 커튼의 부드러운 휘날림 뒤로 산세의 고즈넉한 시간을 12분 영상에 담아낸 작품은 ‘낫싱’. 육 작가가 동중정을 표방했다면 김 작가는 정중동이다. 980㎏의 소금을 끌어다 푸른빛의 거대한 소금대지를 만들고 그 가운데 구름 한 점 띄운 설치작품을 내놨다. 신기루처럼 퍼졌다 사라지길 여러 번, 구름은 소리 없이 거듭 모양을 바꾸는 중이다.

이외에도 순천만의 지평선·수평선 경계를 인간의 세속과 이상으로 나눠 색면추상처럼 그려낸 김일권의 ‘2017.02.09’(2017), 흑백톤의 회화와 영상작업으로 거친 들판에 연기처럼 하얀 불길을 놓은 ‘들불’(2017) 등이 전시장을 채웠다.

육근병의 ‘낫싱: 창과 커튼’(2012). 어느 날 새벽, 양평 작업실에 드리운 하얀 커튼의 부드러운 휘날림 뒤로 산세의 고즈넉한 시간을 12분 영상에 담아냈다(사진=뮤지엄산).
김승영의 ‘구름’(2018). 980㎏의 소금을 끌어다 푸른빛의 거대한 소금대지를 만들고 그 가운데 구름 한 점 띄운 설치작품이다. 신기루처럼 퍼졌다 사라지길 여러 번, 때마침 구름이 자취를 감춘 장면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소란하지 않게 천천히’…산수화 22점은 덤

이번 기획전에는 덤도 있다. 뮤지엄산의 소장품으로 꾸린 ‘한국미술의 산책 Ⅳ: 산수화’ 전이다. 400여점 산수화 중 22점을 엄선, 근대부터 현대까지 한국 산수화의 계보를 연결하는 기획전으로 꾸몄다. 조선 도화서 마지막 화원이던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부터 1900년대 중반에 활약한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을 거쳐 1900년대 후반의 월전 장우성, 풍곡 성재휴, 대산 김동수, 또 현존하는 한국화가인 우현 송영방, 소산 박대성 등 작가 17명을 연대기식으로 아우른다. 전통에서 현대로, 관념에서 실경으로 흘러온 한국 산수화를 시대를 대표하는 이들의 작품으로 돋아 내보자는 의도다.

우현 송영방의 수묵화 ‘구름 위에서 본 산’(연도미상). 뮤지엄산의 소장품으로 꾸린 ‘한국미술의 산책 Ⅳ: 산수화’ 전에 걸렸다. 전통화법의 바탕에 실험적 시도를 더한 작품으로 꼽힌다(사진=뮤지엄산).
풍곡 성재휴의 수묵채색화 ‘산가’(山家·1980). 뮤지엄산의 소장품으로 꾸린 ‘한국미술의 산책 Ⅳ: 산수화’ 전에 걸렸다. 적색·황색·청색을 대비해 그린 추상적인 산수화다. 전통적 형식에 머물지 않는 파격적인 행보가 특징이다(사진=뮤지엄산).


둘 중 어떤 것이랄 것도 없이 전시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고요하다. ‘소란하지 않게 천천히’는 뮤지엄산이 처음부터 내세운 주의고 방침이었다. 지난 5년을 보듬어왔던 그대로 다시 5년을 다져나가겠단 암시일 수도 있을 터. 하지만 미술관 나름의 고민은 있어 보인다. 11월 하순 개장을 목표로 한창 공사 중인 ‘명상관’이 그 방증이다. 산기슭까지 찾아든, 삶이 할퀸 크고 작은 상처의 치유를 원하는 관람객에게 ‘미술관식 쉼터’를 제공하겠다는 거다.

‘풍경이 명상을 이끈다’는 테마의 5주년 기념전은 그 마중물인지도 모르겠다.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넜더니 나무가 기다리고 숲바람이 맞아주더라, 바로 그 행위가 풍경이고 그 광경이 명상 아닌가. 비우고 내려놓으면 ‘그림’이 될 것을, 모르는 척 흘려보낸 시간을 되감는다. 전시는 내년 3월 3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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