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산더미 빚 내 천문학적 세금 내는 현실...상속이 죄인가

논설 위원I 2023.06.08 05:00:00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고(故)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상속세 납부를 위해 총 4조 781억원의 주식담보 대출을 받았다고 한다. 이 선대 회장의 2020년 별세 후 12조원이 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기존 대출 외에 최근 2조원이 넘는 추가 대출을 받았다는 것이다. 세 사람을 포함한 유족들은 2021년 4월부터 5년에 걸쳐 상속세를 분할 납부 중이며 향후 3년간 추가 납부해야 할 세금이 6조원 이상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상속세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부(富)의 지나친 쏠림을 막고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있다. 하지만 세 사람의 소식은 가혹하기로 악명높은 한국의 상속세 체계에 대한 의문을 던지기에 충분하다. 상속세 최고 세율은 과세 표준이 30억원이 넘을 경우 50%이며 최대 주주 할증 과세까지 포함하면 60%로 높아진다. 미국·영국(40%) 등도 세율이 높은 편이지만 공제 혜택이 커 실제 상속세율은 한국보다 낮다. 이 정도면 상속세를 내고 난 후 유족들이 온전히 기업을 이어받고 ‘100년 기업’으로 키우는 걸 기대하는 게 불가능하다. 자칫 빚더미만 남을 수도 있다.

징벌적 수준의 상속세는 삼성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다. 지난해 2월 별세한 김정주 넥슨 창업자의 유족은 지주회사 NXC의 지분 29.3%를 물납했다. 이로 인해 평가가치 4조 7000억원의 주식을 세금으로 거둔 정부는 최근 국내 최대 게임업체의 2대 주주가 됐다. 유족이 현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선택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 업계 전언이지만 “상속 두 세 번만 하면 모든 기업이 국영 회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과도한 상속세는 세금 마련을 염두에 둔 무리한 배당과 주식 매각,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 등 경제 전반에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2000년 이후 상속세 과세 표준과 세율을 23년째 고집 중인 정부가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천문학적 수준의 세금 납부를 위해 상속인들이 산더미 같은 부채를 지게 되고, 가업까지 포기하는 나라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인가. 정부의 반성과 고민, 그리고 대대적인 개편 작업이 속히 뒤따라야 한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