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잠 설친 박성현 "마지막 퍼트 후 나도 모르게 눈물"

주영로 기자I 2018.07.03 06:00:00

KPMG 위민스 챔피언십에서 연장 접전 끝에 역전 우승
전날 호텔 비상벨 울려 두 번이나 잠 설치는 등 어수선
컨디션 걱정했는데 보기 없이 버디만 3개 골라내
16번홀에서 나온 기적 같은 샷 덕분에 연장 끌고가
연장 2차전에서 터진 버디 퍼트로 긴 승부 마침표

박성현이 2일(한국시간) 미국 일리노이주 킬디어의 켐퍼 레이크스 골프클럽에서 열린 LPGA 투어 시즌 세 번째 메이저 대회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서 연장 접전 끝에 유소연과 하타오카 나사(일본)을 제치고 우승한 뒤 큼지막한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AFPBBNews)
[이데일리 스타in 주영로 기자] “마지막 퍼트 후 나도 모르게 바로 눈물이 났다. 그동안 노력의 보상 그리고 기쁨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

박성현(25)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5월 텍사스 클래식에서 시즌 첫 승에 성공했지만, 이어진 3개 대회에서 연속으로 컷 탈락해 ‘2년 차 징크스’의 우려를 털어내지 못했다. 더욱이 기대했던 US여자오픈에서 컷 탈락은 충격이 더 컸다. 박성현은 주변의 우려에 담담하게 반응했다. 평소 감정 표현을 잘 하기 않았던 그는 우려에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걱정하는 모든 이에게 “믿고 기다려 달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2일(한국시간) 미국 일리노이주 킬디어의 켐퍼 레이크스 골프클럽(파72·6741야드)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총상금 365만 달러) 마지막 날 4라운드. 정규라운드로 우승자를 가리지 못해 연장에 돌입했다. 합계 10언더파 278타를 적어낸 박성현과 유소연(28) 그리고 하타오카 나사(일본)가 18번홀에서 1차 연장을 시작했다. 나사가 먼저 탈락했다. 파에 그치면서 버디를 잡은 박성현과 유소연이 2차 연장으로 승부를 이어갔다.

박성현과 유소연은 지난해 올해의 선수를 공동수상한 주인공이다. 이날 연장 승부는 마치 진검승부처럼 다가왔다. 나란히 두 번째 샷을 그린에 올려놓고 퍼트를 앞둔 순간 갑자기 낙뢰 예보가 나오면서 경기가 잠시 중단됐다. 약 10여분이 지나 재개됐고, 박성현은 정적을 가르는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며 긴 승부의 마침표를 찍었다. 순간 두 주먹을 불끈 쥔 박성현은 잠시 캐디의 품에 안겨 눈물을 훔쳤다. 박성현은 “이전 대회까지 조금 힘들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났다”며 “힘든 한해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을 받는 것 같아 기쁨의 눈물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박성현은 이날 우승으로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시즌 2승이자 LPGA 통산 4승 그리고 자신의 두 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을 일궈내며 차세대 여왕을 재확인했다. 박성현은 “진짜 최고로 기쁘다”며 “연장까지 가서 마지막 라운드가 정말 길다고 생각했는데, 우승트로피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며 또 한 번 감격해 했다.

▶박세리를 떠올린 16번홀의 기적

박성현의 극적인 역전 우승의 발판이 된 건 정규라운드 16번홀(파4)에서 나온 기적 같은 샷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두 유소연에 4타 뒤진 3위로 최종라운드에 들어선 박성현은 하타오카 나사와 함께 1타 차 공동 2위로 16번홀을 경기했다. 하지만 두 번째 친 공이 그린 오른쪽 워터해저드 근처로 떨어지는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공은 물에 빠지지 않았으나 긴 풀 위에 놓여 있었다. 해저드 구역 안에 위치해 있어 클럽을 잔디에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성현으로서는 1타라도 잃게 되면 3위로 내려앉을 수 있는 위기였다. 박성현의 선택은 과감했다. 해저드 구역 안에서 공을 쳐내기로 결심했다. 박성현은 신발을 신은 채 워터해저드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불안한 자세로 공을 쳐냈다. 조금이라도 빗맞으면 최악의 상황이 나올 수 있어 위험했다. 모두가 숨은 죽인 채 박성현의 스윙에 집중했다. 잠시 후 탄성이 터졌다. 하늘 높이 치솟은 공은 홀 바로 옆에 멈춰다. 박성현은 주먹을 불끈 쥐며 무언가 확신한 듯 자신을 보였다. 파 세이브에 성공한 박성현은 남은 두 홀을 파로 지켜내며 연장으로 승부를 이끌었다.

이 장면은 20년 전 US여자오픈에서 나온 박세리의 ‘맨발 샷’을 떠올리게 했다. LPGA 투어는 이 모습을 보고 난 후 “박세리가 1998년 US여자오픈 때 했던 장면을 떠올린다”며 “당시 박세리의 ‘맨발 샷’은 한국선수들에게 큰 영감을 줬다”고 평가했다.

박성현은 “캐디가 공의 상황을 확인한 후 ‘공 밑에 물이 전혀 없어 평소 벙커샷을 하듯이 치면 된다’고 자신을 줬다”며 “치자마자 잘 쳤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기적 같은 샷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액땜 그리고 우연

전날 박성현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박성현의 숙소였던 호텔에선 이날 새벽 몇 번이나 비상벨이 울렸다. 정확한 원인을 밝혀지지 않았으나 여러 번 비상벨이 울린 탓에 몇 번이나 호텔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불편함을 겪었다. 박성현은 두 번째 비상벨이 울렸을 때 아예 이불을 들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단 몇 시간이라도 편하게 잠을 자기 위해 차 안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그러나 이마저도 불편했다. 얼마 후 다시 호텔로 들어갔다. 밤새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박성현은 마지막 날 컨디션이 걱정됐다. 다행히 이날 밤의 일은 마지막 라운드 16번홀에서 나올 위기를 이겨내는 액땜같았다.

우연치고는 우승을 암시하는 일은 또 일어났다. 박성현이 마지막 날 경기에 입고 나온 옷은 5월 텍사스 클래식에서 입었던 옷과 같았다. 검은색 모자에 카키색 반팔과 검은색 바지에 상의 안에 입은 이너웨어까지 5월 우승 당시 입었던 옷을 똑같았다. 달라진 건 텍사스클래식 때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뀐 벨트뿐이었다. 이 옷은 의류후원사에서 박성현의 별명을 붙여 출시한 일명 ‘남달라 라인’이다. 우승을 의식해 입은 건 아니었지만, 타이거 우즈의 ‘빨간색 티셔츠’처럼 박성현에게도 우승을 부르는 옷이 됐다.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 우승 뒤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박성현. (사진=세마스포츠마케팅)


지난 5월 LPGA 투어 텍사스클래식에서 우승 뒤 트로피를 들고 있는 박성현이 2일 끝난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 우승 당시 입었던 옷과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사진=AFPBB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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