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풍만한 서역여인들, 흙덩이 돼 돌아온 까닭

오현주 기자I 2018.06.25 00:12:01

아트사이드갤러리 한애규 '푸른 길' 전
1980년대부터 '테라코타' 외길 작업
질박·푸근한 외형 '여인상' 대표소재
서역교류 신라인 북방길 잇는 염원
여인·반인반수 줄지어 세운 '행렬'로
눈동자 등 푸른유약, 문명길 '물흔적'

한애규의 개인전 ‘푸른 길’에 나선 ‘행렬’. 풍만한 자태의 여인상을 빚은 ‘조상’(2018) 시리즈를 앞세우고, 반인반수의 ‘신화’(2017) 시리즈, 소와 말 등을 다듬은 ‘실크로드’(2017) 시리즈 등을 줄지어 세웠다. 이들은 인류문명의 교류가 시작됐던 그 길 ‘서역’을 떠나 한반도로 이동하는 중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내가 작업을 하는 것은 이 모든 두려움에 대한 도피요 피난이다. 그것은 아편쟁이의 아편이요, 횡행하는 모든 종교요, 춤바람이고 도박이다. … 어쨌든 내 짧은 개인사의 우연과 필연의 결과로서 나는 현재 이 일을 하고 있으며, 기왕 칼을 뺐으니 두부라도 썰겠다는 심정으로 칼을 뺀 내가 부끄러워 작업에 매달리는 것이다”(한애규 ‘여행이란 이름의 사색의 시간’ 중에서).

붉은 황토, 희멀건 한 황토. 제 각각의 색을 입은 몸뚱이를 드러낸 조각상이 줄지어 섰다. 이들은 저 멀리 한 곳에 시선을 박은 채 어디론가 향해 가는 중이다. 저돌적인 행군은 아니다. 다소곳이 다리 위에 두 손을 내린 채 한 발씩 조심스럽다. 채 1m가 안 되는 아담한 크기. 돌로 철로, 흔히 거대하고 단단한 조각상으로 내리누르는 위압감 따위는 없다.

조각가 한애규(65). 그이는 흙 작업을 한다. ‘테라코타’, 흙을 빚어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는 그것만 고집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라고 기억하니 30년을 훌쩍 넘겼다. 실험과 고안, 스스로 터득한 방법을 키우고 심화시키며 그이만의 특별한 조형언어를 쌓아왔다.

그 세월 동안 고집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여인상이다. 질박하고 푸근한 여인의 외형으로 그이는 인생을 표현한다. 한 작가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풍만한 가슴과 배, 엉덩이, 또 절대로 넘어지지 않을 튼튼한 다리를 가졌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 여인들은 결코 자신을 위해 이런 몸을 만들지 않는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참고 싸우고 부풀린, 척박하고 고단한 삶이 쌓은 몸뚱이인 거다.

한애규의 ‘조상 4’(2018). 작가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소재인 ‘여인상’이다. 풍만한 가슴과 배, 엉덩이 등을 가진 질박하고 푸근한 여인의 외형으로 작가는 ‘인생’을 표현한다(사진=아트사이드갤러리).


굳이 여인상이 아니더라도 그이의 작품은 각지고 모난 데가 없다. 은근한 곡선미를 자랑하듯 모든 형상은 물 흐르듯 제 몸을 세상의 흐름에 뚝 떨군다. 두리뭉실하고 단순하다. 질박하고 푸근하다. 부드럽고 따뜻하다.

△끊어진 북방길 잇는 여인·반인반수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 펼친 한 작가의 개인전 ‘푸른 길’.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을 법한 한 작가의 테라코타 조각상 40여점이 나들이를 나왔다.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건 줄잡아 15점은 넘게 무리지어 나선 긴 ‘행렬’. 둥글둥글한 여인상을 빚은 ‘조상’(2018) 시리즈를 앞세우고, 반은 사람이고 반은 동물인 반인반수의 ‘신화’(2017) 시리즈, 소와 말 등 인간과 친밀한 가축을 다듬은 ‘실크로드’(2017) 시리즈 등이 한무더기다.

이번 전시에는 한 작가는 고유의 여인상 외에 특별한 소재 한 가지를 더 보탰는데. 가슴 위로는 사람이고 가슴 아래로는 동물인 ‘반인반수’ 상이다. 얼굴과 가슴은 천상 여인이나 네 발과 꼬리를 단 소와 말이 여럿이다. “기마민족의 흔적을 짚어보자 해서 말을 끌어왔고, 소는 사람과 친하니까 당연히 뒤따라오지 않았을까” 해서 세웠단다.

한애규의 개인전 ‘푸른 길’에 나선 ‘행렬’ 중 중반 이후 부분. 반인반수, 소와 말을 형상화한 조각상을 줄지어 세웠다(사진=아트사이드갤러리).
한애규의 ‘신화 3’(2017). 개인전 ‘푸른 길’에 나선 ‘행렬’ 중 후반부에 세웠다. 가슴 위로는 사람이고 가슴 아래로는 동물인 ‘반인반수’ 상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래. 그렇다면 이 행렬은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가는 중인가. 인류문명의 교류가 시작됐던 그 길이었다. 이들은 서역을 떠나 우리 땅 한반도로 이동하는 중이다. 왜 굳이? 이들의 ‘행렬’에는 배경이 있다. 7∼8년 전 읽은 책 한 권이 모티브가 됐단다. ‘실크로드를 달려온 서역인’이었다는데, 내용 가운데 끝간 데 없이 뻗어 나간 옛 신라인의 행보가 좋았나 보다. “아주 오래전 우리의 교역길은 중국이나 만주 이상이더라. 북방으로 훤히 열려 있던 길이 남북분단 탓에 너무 좁아졌다.” 섬 아닌 섬이 돼버린 한반도가 안타까웠다는 얘기다.

늘 품고 있던 그 생각이 이제야 작품으로 터져 나왔다. 2016년 늦은 겨울부터 2017년 여름까지, 1년 8개월여에 걸쳐 완성한 ‘행렬’에는 한반도에서 북방으로 향하는 길이 다시 이어지길 소원하는 한 작가의 마음이 들어찼다. “그저 막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그이의 바람이 온전히 삐져나온, 사람과 동물·문화가 교류했던 과거 행렬을 상상 속에서 빼낸, 시간과 역사의 흔적인 것이다.

작가 한애규가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서 연 개인전 ‘푸른 길’ 전에 세운 ‘행렬’ 곁에 섰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흙 향한 진정성…작가 빼닮은 여인들

3년여 만에 같은 장소에서 여는 개인전에서 한 작가는 지난 전시 ‘푸른 그림자’에 이어 ‘푸른’을 그대로 가져왔다. ‘푸른’은 조각상에서 유달리 시선을 끄는, 흙색 사이에 끼인 화룡점정 같은 푸른 유약을 의미한다. 여인들의 발밑에, 반인반수의 눈동자에, 기둥 조각에 보일 듯 말 듯 고인 그 푸른색. 한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길에 놓였던 ‘물의 흔적’이다. 그들이 건넜거나 보았거나 만졌거나 마셨거나 발을 적셨던 그 흔적.” 그래서인가. 한 작가는 그 ‘푸른’에 ‘터키청’이란 유약을 쓴다고 했다. 옛날 서역인이 출발한 곳이 바로 터키 언저리라고.

“흙 주무르는 게 너무 좋아 시작했다. 흙을 만지고 있으면 평온해지고 촉촉해진다. 하지만 즐거움이 두 개라면 고통은 여덟 개쯤.” 작가의 테라코타 작업은 획기적이었다. 하지만 좋게 말해 ‘획기적’이지 선·후배와 동료 사이에선 ‘왕따’ 감이었다. 유약도 바르지 않는 흙 작업이라니, 아마 조각의 품격을 떨어뜨린다고 생각들 한 모양이다. 웬만해선 못 견뎠을 그 작업을 한 작가는 해냈다. 평생 그이를 키운 유일한 스승이라는 “고고학 인물들”을 벗 삼아.

한애규의 ‘조상 3’(2018). 작가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소재인 ‘여인상’이다. 풍만한 가슴과 배, 엉덩이, 다리 등을 가진 질박하고 푸근한 여인의 외형으로 작가는 ‘인생’을 표현한다. 발밑에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길에 놓였던 ‘물의 흔적’을 표현한 푸른 유약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한애규의 ‘조상’(2018) 시리즈의 뒷 모습. 작품을 구워내는 가마의 온도가 높을 수록 흙은 하얗게 변한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하지만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다. 흙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구워내는 가마의 온도가 중요하단다. 보통은 소성온도 1000~1200℃ 정도로 작업한다. 온도가 높을수록 흙은 하얗게 변하고. 한 작가 자신이 털어놨듯 1000℃ 정도서 구운 흙이 부드럽기는 어렵다는데, 그이의 작품에서 거친 느낌을 찾아내는 건 더 어렵다.

한 점을 제작하는 데는 대략 30∼40일쯤 걸린단다. 20∼25일간 빚고, 보름은 말리고, 가마에 넣어 사나흘쯤 구워내고. 그중 한 작가가 유독 신경을 쓰는 것은 ‘표정’. 작품에 표정을 만드는 날에는 긴장감이 여느 날과 다르다고 했다.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정돈하고. “어떤 날은 한 번에 긋고 다듬기도 하는데 어떤 날은 수십 번을 그어도 원하는 표정이 나오질 않는다. 그날은 그냥 깨끗이 접는다.”

비단 표정뿐이겠나. 살려내는 것보다 깨버리는 게 더 많을 건 굳이 세어봐야 알 수 있진 않을 것이다. “석기시대 도공, 중국 진시황릉의 병마용을 만들어낸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흙을 향한 진정성. 그 하나만으로 빚어낸 ‘서역에서 온 여인들’은 한 작가를 무척 빼닮았다. 전시는 7월 19일까지다.

작가 한애규가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서 연 개인전 ‘푸른 길’ 전에 내놓은 자신의 작품 ‘청금석을 든 여인’(2018) 옆에 섰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