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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통렬하고 매혹적인 재난 블랙코미디, 여운 긴 130분[봤어영]

김보영 기자I 2023.08.01 08:00:00

'아파트'란 한국적 공간을 통해 환기한 보편적 정서
재난으로 전복된 일상…극한의 상황 속 인간군상 그려
블랙코미디·스릴러의 변주, 중심 이끈 레전드 이병헌
몰입도 더한 압도적 영상미와 VFX…엄태화 내공 빛나
시청각 체험·철학적 고민 담은 반가운 상업영화 탄생

[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 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나의 아파트.”(윤수일 ‘아파트’ 가사 中)

약 1200만 채, 우리나라 전체 주거 공간의 60%를 차지하는 아파트. ‘아파트 공화국’ 한국의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파트는 단순히 ‘사람이 사는 곳’ 그 이상의 의미를 띠며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그 시절 아파트는 가파른 도시화 속 서울에 대한 환상을 안고 도시로 몰려든 농촌 사람들의 꿈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지는 건물 층수는 평민층에서 중산층으로,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의 계급 상승을 끝없이 갈망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대변했다. 이미 부를 거머쥔 누군가에게는 가진 부를 더욱 불리는 재산 축적, 재테크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부에 대한 욕망과 계급 불평등, 내집 마련의 꿈으로 뒤엉킨 우리나라 민초들의 지난한 근현대사가 60년 아파트의 역사에 다 담겨 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는 대재난으로 인해 기존 사회에서 통용하던 계급과 거래, 상식의 개념이 붕괴되어버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이 ‘아파트’란 공간을 배경으로 녹여냈다. 올 여름 출격하는 한국영화 ‘빅4’의 마지막 주자로,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인기 웹툰 ‘유쾌한 왕따’가 원작으로 이 작품의 2부 ‘유쾌한 이웃’을 모티브로 영화적 상상력을 거쳐 각색됐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부산행’, ‘엑시트’ 등 기존의 재난물과 아포칼립스물과는 확연히 결이 다른 작품이다. 무기를 손에 쥔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재능을 살려 재해 혹은 괴물과 싸우는 재난 액션 블록버스터를 상상하고 이 영화를 본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재난’이란 특수한 상황을 둘러싼 사람들의 내적·외적 갈등, 극한이 내몬 그릇된 신념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이 서서히 스러지는 과정들을 냉소적이면서도 통렬히 그려낸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오프닝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결과로 탄생한 아파트란 공간의 역사를 톺아보며 시작한다. 그리고 현재 시점, 희망과 야망이 집약된 콘크리트 천국 서울은 ‘대지진’으로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허무하고 처참히 붕괴된 건물 무덤들 속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고 남은 건 황궁 아파트뿐. 장엄하게 우뚝 선 황궁아파트의 모습을 비추며 이야기를 여는 오프닝 시퀀스가 강렬히 시선을 사로잡는다.

대지진은 단숨에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어버렸다. 권력과 자본이 좌우하던 기존의 계급 논리는 무용지물이 됐다. 현금은 쓸모를 다한 종잇조각에 불과했고, 맞은편 상류층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시하던 황궁 아파트 주민들에게 구걸하는 신세가 됐다. 국회의원마저 이곳에선 전혀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또 다른 노숙자 한 명에 불과했다.

이곳에서의 계급은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아파트’의 입주민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개편되기 시작한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외부인들 때문에 자꾸 불편을 겪자 그들을 내쫓기 위한 대책 회의를 연다. 이어 부녀회장 금애(김선영 분)의 주도에 공무원 출신 민성(박서준 분)의 아이디어로 아파트의 대소사를 해결해줄 주민 대표를 뽑기로 뜻을 모은다. 홀로 몸을 날려 아파트 1층에 번진 불길을 끈 902호 주민 김영탁(이병헌 분), 그의 희생정신을 높이 산 주민들의 만장일치로 김영탁이 주민 대표에 선정된다. 영탁은 희생정신을 또 한 번 발휘해 외부인들을 쫓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이를 계기로 주민들은 그를 ‘히어로’처럼 추앙하며 따르기 시작한다.

블랙코미디로 시작해 서스펜스 스릴러를 거쳐 참극까지. 영화는 오로지 인물 간 심리 변화와 갈등을 통해 자유자재로 장르를 변주하며 휘몰아치는 전개를 보여준다.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과 함께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130분이 순식간에 흐른다.

레전드 이병헌의 명불허전 열연과 카리스마가 극의 중심을 든든히 받쳐준다. 이병헌이 맡은 ‘김영탁’은 주민대표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다. 머뭇대고 말수도 적은 성격이었지만, 오로지 ‘희생정신’ 때문에 등 떠밀리듯 대표가 됐다. 이병헌은 소극적이었던 영탁이 점점 변해가는 과정을 소름끼치게 표현해 긴장감을 유발한다.

주민들의 신임을 얻을수록, 황궁 아파트의 시스템은 영탁을 중심으로 변화한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란 불변의 원칙 하에 황궁 아파트는 철저한 공동체 사회가 되고, 입주민들은 아파트에 살지 않는 외부인들을 ‘바퀴벌레’라 부르며 배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입주민들의 이익만을 위한 극단적 공리주의에 반기를 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영탁의 리더십은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이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아파트를 지키겠다는 영탁의 신념이 점차 집착과 광기로 변질된다. 주민들을 위했던 영탁의 봉사정신이 어느새 독재에 가까운 공포 정치가 될수록 갈등은 극을 향해 치닫는다. 눈을 갈아 끼운 듯 광기에 사로잡힌 ‘영탁’을 표현한 이병헌의 연기가 그의 필모그래피 통틀어 ‘인생 열연’이라 부를 만큼 전율을 선사한다.

이병헌과 함께 다양한 인간군상을 연기한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박지후, 김도윤 등 다른 배우들의 열연도 구멍 하나 없이 훌륭하다. 가족을 위해 무엇이든 버릴 준비가 된 민성, 어떤 상황에도 신념을 지키려는 명화(박보영 분), 아파트와 내 아들의 평화를 지키고 싶은 금애, 아파트의 특권의식과 이기주의에 반기를 든 도균(김도윤 분)과 혜원(박지후 분). 이 영화는 도덕성을 끊임없이 시험받는 상황에 놓인 인간들의 다양한 군상, 각기 다른 그들의 선택을 통해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진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무엇이 인간다움인가’.

폐허가 된 서울의 풍경, 대지진의 폭발을 실감나게 담은 압도적 스케일의 영상미와 VFX(시각특수효과), 뛰어난 미쟝센이 몰입감을 더한다. 이병헌과 박지후가 각기 다른 버전으로 열창한 가수 윤수일의 ‘아파트’, 각종 클래식 곡들을 접목한 OST도 영화 특유의 비극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한 매력을 북돋는다. 전작 ‘잉투기’(2013), ‘가려진 시간’(2016)으로 쌓은 엄태화 감독의 내공과 미학이 7년의 숙성을 거쳐 제대로 빛을 발했다.

‘아파트’란 공간을 통해 전세 사기, 주택 대출, 주민 갈등 등 지극히 한국적인 이슈를 다루면서,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가 공감할 인간의 보편적이고도 원초적인 감정들을 건드린 수작이다.

다만 올 여름 개봉을 앞둔 한국영화들 중에선 가장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띤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쾌감 대신 착잡한 물음표의 여운이 남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린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한다. 스크린 영화의 미덕인 시청각적 체험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조화롭게 담은 보기드문 상업 영화의 등장을 축하해줄 필요가 있다.

8월 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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