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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닥쳐라! 영화평론] 고리키의 어머니, 그리고 위르겐의 택시 기사

고규대 기자I 2017.07.28 11:06:35

'택시운전사' 리뷰

영화 ‘택시운전사’
[오동진 영화평론가] 생각지도 않은 얘기일 수도 있고 늘 생각해 왔던 얘기일 수도 있다. 장훈 감독의 신작 ‘택시 운전사’는 상당 부분 막심 고리키의 혁명 소설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는 1980년대에 사람들이 읽지 못하는 금서(禁書)였다. ‘택시 운전사’ 속 택시 운전사와 ARD 동아시아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의 얘기도 80년대 당시에는 철저하게 금기시되는 것이었다. 아무도 ‘어머니’를 얘기하지도, ‘광주의 학살’을 얘기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4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 많은 사람은 고리키의 소설도 잊고 광주의 비극도 점차 잊어 간다. 장훈 감독이 놀라운 것은 그렇게 광주의 과거를 잊으라고 강요하던 시기, 곧 가장 끔찍한 역사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박근혜 정부 때 이 영화를 기획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 감독은, 종종 뛰어난 예지(叡智) 능력을 선보인다. 장훈은 2년 전 지금이야 말로 광주에서의 ‘그때처럼’ 저항해야 할 때라는 것을 직관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택시 운전사’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단순한 것일 수 있다. 아마도 궁금증때문에 시작됐을 것이다. 힌츠페터는 어떻게 광주에 들어갔을까. 그는 또 어떻게 나왔을까. 현장에서 그는 어떻게 촬영을 할 수 있었을까. 혼자였을까? 누군 가와 같이 있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은 힌츠페터가 자신을 태워 준 택시 기사 김사복의 존재를 오래전에 밝혔음에도 그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더 확장됐을 것이다. 김사복은 지금 어디 있을까. 왜 그는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김사복과 힌츠페터는 광주에서의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지냈던 것일까.

역사에는 디테일이 없다. 역사는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독일 기자가 광주에 몰래 잠입해서 광주의 참상을 기록했고 그것을 해외 언론에 알렸다는 정도로만 기술한다. 힌츠페터의 ‘활약’으로 광주는 ‘폭동’에서 ‘학살’로 바뀌게 됐다. ‘택시 운전사’는 힌츠페터 만큼 주요한 역할을 했을 법한 한 평범한 사람에게 주목한다. 그가 역사의 현장에서 느꼈을 그 참혹한 정서를 알리려고 애쓴다. 그의 생은 광주 이전과 이후로 크게 갈리게 됐을 것이다. 우리 모두도 그렇다. 광주를 직접 겪었던 그렇지 않든, 광주의 역사를 인지하고 인식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갈리게 된다. ‘택시 운전사’는 2시간 동안 그 역사의 갈림길 한가운데를 주행(走行)해 간다.

영화 ‘택시운전사’
다시 고리키로 돌아가면, 그의 책 ‘어머니’가 한국에서 오랜 기간 금서였던 이유는 ‘사회적 의식화’의 주요한 기제(機制)쯤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소설 ‘어머니’ 속 어머니는 원래 아무 지식도, 이념도, 욕망도 없는, 그저 폭력적인 남편(제정 러시아 말기의 농노 출신 남자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에게 학대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여자였을 뿐이다.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딱 하나, 혁명적 의식으로 살아가는 노동자 아들 빠벨을 위해서다. <택시 운전사>의 택시 운전사 만섭(송강호)도 마찬가지다. 그는 하루하루 시내를 쏘다니며 대학생들이 허구 헌 날 공부는 안하면서 ‘데모 질’만 하고 산다고 불평을 쏟아 내는 인물이다. 박정희 시대 때 사우디에서 중장비 기사로 일하며 열사(熱沙)의 노동을 견뎌 냈던 그는 자신이 한국의 경제 중흥을 이끌어 낸 진짜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운전을 하며 이런 식으로 중얼대곤 한다. “그 뜨거운 사막에 한번 있어 보라지. 저거 다 배가 불러서 그러는 거야.”

문제는 그 자신조차 배가 부르지 않다는 것이다. 아내를 일찍 여읜 그는 사글세 방에서 홀로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 아이를 키우며 산다. 만섭은 자유가 어쩌고, 독재가 어쩌고 하기 보다는 오직 딸 애를 잘 해 먹이고, 잘 해 입힐 생각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돈이 최고다. 만섭이 아무 생각없이 광주로 간다는 외국 손님, 곧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래취만)를 가로 챈 것은 순전히 ‘돈 욕심=딸 아이 양육비’때문이었다.

결국 고리키의 ‘어머니’가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아들 ‘빠벨’때문에 변하게 되는 것처럼 만섭 역시 독일에서 온 기자 때문에, 딸 아이의 진정한 미래를 위해, 군부 독재가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해 가던 당시의 정치환경에 눈을 뜨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섭이 광주에서 겪은 공수부대의 만행만으로 기존의 생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장훈은 야만의 국가 폭력을 생생하게 그려 내는데 주력한다. 주인공 만섭이 자책(自責)을 해 가며 현실을 깨달아 가는 과정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감(共感)의 폭을 넓혀 가게끔 이야기를 엮어 낸다. 하지만 만섭이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꾸게 되는 계기는 이 독일인을 현장에 버리고 혼자 떠나 오면서부터 이다. 영화가 사람들의 누선(淚腺)을 자극하는 것도 이때부터이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그렇게 만섭의 ‘회군’에서 이루어진다.

영화 ‘택시운전사’
사람들이 머리통이 깨져 죽어 나가거나, 죽은 아들 앞에서 통곡하는 에미나 할머니의 모습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묵묵부답, 서울로 돌아가는 차를 운전하다가 순천 어디쯤에서 홀로 국밥을 먹으며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는 만섭에서 사람들은 심금(心琴)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만섭은 광주에 남아 있는 것이 무서웠었다. 무엇보다 딸 아이가 혼자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었다. 그는 돌아가야만 한다. 여기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이 사람이라면 아무리 외면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는 돌아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새벽에 몰래 광주를 벗어 난다. 하지만 그는 순천으로 가는 오전 내내 마음이 무겁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국인을 사지(死地)에 놓고 온 것 같아 안절부절이다. 국밥 집에서 사람들이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가지고 설왕설래, 빨갱이 폭도가 어쨌다는 둥 해도 그는 그게 아니라고, 거기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고 말 한 마디 변변하게 하지 못한다. 이제 그는 오히려 자신의 비겁이 점점 두려워 지기 시작한다. 다시 운전대를 잡은 그는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장훈이 뛰어 난 점은 어쩌면 평면의 역사로 일반화 되고 있는 약 40년 전 광주의 비극을 택시 운전사와 독일 기자의 ‘개인적’ 관계를 통해 입체화 시키고 구체화 시킴으로써 이 때의 역사에는 여전히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세부적인 에피소드들이 켠 켠이 쌓여 있음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무릇 세상은, ‘단 한 사람’을 구하려는 ‘단 한 사람’의 노력이 경주될 때 비로소 궁극의 구원을 얻는다. 세상 자체를 구하려는 영웅은 그 세상은 구할지 언정 그 안의 사람들까지는 구해 내지 못한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이라도 구하려는 평범한 사람은 끝내 세상까지 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역과 귀납의 논리는 기이하게도 역사 속에서 감춰져 있기 일쑤다. 장훈의 ‘택시 운전사’는 바로 그 점을 보여 준다. 얼마나 많은 범인(凡人)들이 세상을 구해냈는지 보여 주려 애쓴다. 우리가 다 아는 척, 사실은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광주’의 얘기를 깨닫게 해 준다. 만섭이 위르겐을 다시 태우려고 광주로 유턴을 하는 장면 이야말로 이 영화가 줄곧 얘기하고 싶었던 지점의 중심에 서있다. 돌아가는 것이다. 거기가 아무리 위험해도 사람이라면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만섭이 핸들을 돌리느냐 마느냐의 순간이야말로 우리 역사에서는 진정한 갈림길이었던 셈이다.

‘택시 운전사’는 어쩌면 의미 있는 반복 어와 같은 영화다. 이제 더 이상 광주의 얘기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극의 얘기는 이번 ‘택시 운전사’처럼 끝까지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한(恨)의 멍울을 풀어 줄 방법이 없다. ‘택시 운전사’로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정신적 트라우마를 해소하게 될 것이다. 그거면 됐다. 영화는 때론 제작의 과정이나 방법보다 그 목표와 의지가 더 중요한 법이다.

영화 ‘택시운전사’
송강호의 연기, 그의 전매 특허인 중얼대는 독백 연기(만섭이 위르겐을 버리고 혼자 떠나기 전 돌아 누어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 중 하나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 준다. 이런 연기는 역사적 공감이 없이는 공허해 보이기 십상이다. 그는 연기를 위해 역사 혼을 스스로 불러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번 영화로 그는 자신이 당대 최고의 연기자 중 한 명임을 당당하게 입증해 냈다. 송강호 만큼 토마스 크래취만의 연기 역시 발군에 발군이다. 그는 진짜 위르겐 힌츠페터처럼 느껴진다. 그를 캐스팅한 것 자체가 이 영화의 찬란한 성취를 보여 주는 부분이다.

장훈 감독은 그가 늘 한국 현대사의 골짜기를 다니면서도(‘고지전’ ‘의형제’) 따뜻한 심성을 잃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는 착한 사람이다. 역사의 주체는 착한 사람이 맡아야 한다. 장훈과 그의 새 영화 <택시 운전사>는 지금의 우리들의 삶이 과거 어떤 사람들에 의해 간신히 나마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됐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 근데 그건 참 진부한 얘기일 수 있다. 그래도 하는 수 없다. 거기에 늘 진리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오동진의 닥쳐라! 영화평론]은 영화평론가 오동진과 함께합니다.

글을 쓴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상세하다 못 해 깨알과 같은 컨텍스트(context) 비평을 꿈꿉니다. 그의 영화 얘기가 너무 자세해서 읽는 이들이 듣다 듣다 외치는 말, ‘닥쳐라! 영화평론’. 그 말은 오동진에게 오히려 칭찬의 글입니다. 윗글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닥쳐라!’ 댓글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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