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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 인기 끌어가는 '여배우의 힘'

조선일보 기자I 2008.10.08 09:18:51

그녀들이 망가질수록 관객들은 환호한다

'엽기·청순' 오가며 변신 독립영화 위주 연기폭 넓혀

[조선일보 제공] 7일 오후 부산 해운대 피프(PIFF·부산국제영화제) 빌리지 야외 무대. 승무원들의 일상을 그린 일본 영화 '해피 플라이트'의 월드 프리미어(첫 상영)를 위해 부산을 찾은 배우와 감독이 팬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숄을 두른 일본 여배우 아야세 하루카가 손짓하며 "부산 사랑해요"를 우리말로 외치자 관객의 반응은 더욱 거세진다. 전날 극장에는 5000여명의 관객이 모여 뜨거운 열기를 반영했다. 얼마 전 부산을 찾은 우에노 주리도 이에 못지않은 환영을 받았다.

이들이 한국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그들을 반기는 팬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크다. 영화·드라마를 넘나들며 청순과 엽기를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20대 일본 여배우들은 최근 일본 문화의 인기를 끌어가는 대표적인 원동력이다.

◆내숭? 버리면 뜬다

우에노 주리(22)를 비롯해 아야세 하루카(23), 호리키타 마키(20), 나카마 유키에(29) 등 일본을 대표하는 여배우들을 관통하는 한 가지는 바로 '엽기 코드'다. 특히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그녀들은 평소의 청순 이미지를 벗고 눈물 나게 코믹하도록 변신한다. 국내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와 자주 비교되며 최근 다시 이슈가 된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의 주인공 우에노 주리는 대표적인 배우. 사흘간 머리를 안 감고, 5일 동안 목욕을 안 하며, 하루 만에 집 안을 쓰레기통으로 만들고, 땅바닥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 먹을 정도의 폭넓은(?) 식성을 자랑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야세 하루카도 비슷하다. 19세 때 주인공으로 출연한 드라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서 청순 가련 배우로 명성을 날렸던 그녀를 '여배우'로 만들어준 건 지난해 방송된 '호타루의 빛'이었다. 극중 연애 세포가 말라버렸다고 해서 붙은 '건어물녀'란 별명 덕에 국내외에서 '건어물녀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밖에선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지만 집에만 오면 운동복 차림에 맥주를 들이켜고,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방바닥에서 뒹구는 모습이다. '아름다운 그대에게'에서 남장 여자를 맡은 호리키타 마키는 이와 비슷한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이 인기를 끌면서 다시 주목 받았고, '고쿠센'의 억센 선생 양쿠미를 맡은 나카마 유키에는 예쁜 얼굴과 달리 운동복 차림에 거센 발길질을 거침없이 뿜어내며 현재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내숭을 버리는 순간, 그녀들은 스타가 되는 것이다.

◆스타성은 독립 영화로부터

김지석 부산 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는 일본 여배우들의 지속적인 변신에 대해 "독립 영화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영화 제작 편수의 50% 정도가 독립 영화로 채워지기 때문에 톱스타들이 작가주의 영화에 꾸준히 출연하며 연기 폭을 넓힌다는 것. 시청률이 주 목적인 드라마에선 최대한 자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개인을 완성하는 한편, 영화에선 주로 옆집 여자 같은 연기를 하다 보니 캐릭터 역시 다양해진다는 것이다.

또 여배우들이 '놀 수 있는' 공간 역시 넓다. 영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도쿄 걸'의 주인공 카호(17)처럼 10대 스타가 끌어가는 영화 숫자가 많고, 배우 역시 품질을 지키는 선에서 '다작'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프로그래머는 "홍콩에서는 한 명이 뜬다 싶으면 백화점 내 각종 행사까지 동원돼 배우들의 가치를 깎아 내리는 반면 일본 매니지먼트사들은 배우들의 퇴출도 서슴지 않으며 이미지 관리에 힘쓴다"고 설명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잘나가는 배우일수록, '과작(寡作)' 경향이 강하다.

이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일상적이면서도 입체적이다. 한국 멜로 영화나 드라마가 주로 '스토리 라인'에 중점을 둔다면 일본 것은 캐릭터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대다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나 '메종 드 히미코' 등 주인공의 개성이 확실한 영화를 굳이 들지 않아도, '무슨 내용'보다는 '어떤 주인공'이 더 부각되는 게 일반적이라는 설명이다. 청주대 영화학과 심은진 교수는 "일본은 보통 캐릭터를 통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데 비해 우리는 이야기 속에 캐릭터가 묻어가는 편"이라며 "억압된 사회일수록 문화 속에서 허구와 터부를 즐기면서 비현실적이고 극적인 캐릭터를 내세우게 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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