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1세 정지현은 올림픽 최고 스타였다.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0㎏급에서 그리스 강호 로베르토 몬손을 3대0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따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이변의 금(金)'이었다.
귀국 후 그는 '벼락스타'가 됐다. 가수 'MC몽'을 빼닮은 외모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TV방송, CF촬영으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2억원에 가까운 부수입도 누렸다. 무명생활 '안녕'이었다.
#2008년 베이징,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올림픽
25세 정지현은 당초 그의 예상보다 훨씬 일찍 한국으로 돌아왔다. 올림픽 폐막이 일주일이 넘게 남은 시기였다. 올림픽 2연패(連覇)의 부푼 꿈을 안고 베이징에 갔던 정지현은 8강에서 텐기즈바예프(카자흐스탄)에 역전패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 패'였다. 정지현은 한국에서 TV를 못 틀었다. 동료들이 외치는 승리의 환호성이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랬던 그가 2년 만에 국가대표가 돼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나서게 됐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심한 팔꿈치 부상으로 3개월간 재활에만 매달렸고, 2009년엔 세계선수권 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지는 굴욕을 당한 뒤였다. "정지현은 끝났다"는 사람들의 뒷말을 이겨내고 얻어낸 성과였다.
다시 날아오르려는 정지현을 태릉선수촌에서 만났다. 그는 약속시간에 40분 늦었다. 오전 훈련을 마치고 물리치료실에서 마사지를 받다가 잠이 들었다고 했다. 정지현은 "이젠 체력이 달려서 금방 지친다"고 웃으며 말했다.
■아테네 올림픽이 끝나고
정지현은 올림픽이 끝나고 공항에서 보게 된 수많은 환영 인파를 잊지 못했다. 그가 알던 세상은 이토록 밝은 곳이 아니었다. "동굴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기분이었다"는 것이 그의 표현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라는 말은 그에게 딱 어울렸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다. 가수 MC몽과는 아이스크림 CF를 찍었고, TV 예능 프로에 함께 출연해 사람들 앞에서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부르는 술자리에도 계속 나갔다.
레슬링 매트에서 땀범벅이 돼 구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럴수록 나태해졌고, 운동이 싫어졌다. 정지현은 "사람도 안 보면 멀어지는데 운동이라고 안 그러겠느냐"고 했다.
아테네 올림픽 직후 60㎏급에서 66㎏급으로 체급을 올린 것도 게으름이 원인이었다. 72㎏까지 불어버린 체중을 줄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결정한 일이었다. 하지만 게으름은 실패를 불러왔다.
그는 체중에 맞는 근력을 키우지 못했고, 경기마다 패했다. 결국 정지현은 베이징 올림픽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60㎏급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해이해진 그가 예전 경기력을 찾을 수는 없었다.
■베이징 올림픽 후
허무한 패배를 당한 정지현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그의 뒤에서 흘러다니던 웅성거림도 아직 그의 귓가엔 남아있다고 한다.
정지현은 라커룸으로 가던 도중에 경기장 복도 한편에 주저앉아 무너진 자신을 원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월엔 훈련 도중 왼쪽 팔꿈치 부상도 당했다. 전치 3개월이었다.
기계 체조(석수초5·6), 유도(초6~불곡중3)를 모두 거치며 유연성을 길러온 정지현이 그렇게 크게 다치긴 처음이었다. 그는 "정신이 빠지면 부상도 당한다"고 했다. 지난해 3월에 겪은 치욕은 최악이었다.
오랜 재활을 마치고 참가한 세계선수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정지현은 한 경기도 완벽하게 못 뛸 정도로 체력이 바닥이었다. "헉헉대는 꼴이 완전 '땡칠이' 같았죠." 물론 탈락했고 정지현은 "그때 정신 차렸다"고 말했다.
■다시 출전을 앞두고
작년 6월 정지현은 일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한 살 연상인 연인 정지연(28)씨와 6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하며 삶의 안정을 찾은 것이었다. 다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아내는 임신 2개월째다. "무조건 런던 올림픽(2012년)까진 가겠다"는 각오가 정지현의 어깨 위에 더 큰 책임감이 얹혀져 있는 이유이다. 정지현은 요즘 팀에서 가장 훈련을 열심히 한다.
나이가 들어 예전엔 신경도 안 썼을 작은 부상도 그를 아프게 만들지만 어렵게 재무장한 정신력을 이제 와서 버릴 수는 없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내 인생도 성장했어요. 두 번 다시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요." 태릉선수촌 레슬링장 입구 한편엔 이렇게 적혀 있다. '싸워서 이기고 지면 죽어라.' 정지현은 그 앞을 매일 지나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