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장인 리더십] 3회초, 즐기는 리더의 힘

정철우 기자I 2007.11.07 09:47:26
▲ 가쓰라고교 졸업사진. 맨 뒷줄 가장 큰 학생이 김성근 감독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김성근 감독은 재일교포 2세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거기서 마쳤다. 그리고 그는 찢어지게 가난했다. 단 두 줄의 사실만으로 가설이 줄을 잇는다.

“김 감독은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이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때부터 독기를 품고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이 같은 가설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초등학교 때는 그런 일이 좀 있었다. 하지만 이후엔 글쎄...”

초등학교 시절 김 감독은 주위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10여명에게 둘러 쌓여 두들겨 맞은 적도 있다. 그러나 6학년때 학교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던 학생과 1대1로 맞붙어 이긴 뒤론 맘 편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중학교 이후론 오히려 학교의 주류세력이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한국 사람이란 걸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알아도 굳이 문제삼지 않았다. 고3때 재일교포 선수단에 포함돼 한국을 다녀 온 뒤에는 전교생이 다 알게됐지만 불편했던 기억은 없다.

지금은 잘 상상이 안되지만 중학교 땐 학교 연극의 주연으로 나선 적도 있고 고등학교땐 축제 사회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가 중심에 서는 것에 대한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김 감독을 잘 따랐다. 그에 대한 호칭만 봐도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다. 친구들은 그를 “가네바야시(金林)상”이라고 불렀다. ‘상’은 상대롤 존중하는 뜻에서 붙이는 호칭이다. 친근한 사이끼린 ‘짱’을 붙인다. 이승엽(요미우리)은 동료들에게 “승짱”이라고 불린다.

가쓰라 고교시절 학교에 젊은 여자 선생님이 부임해 첫 수업을 들어왔다. 김 감독은 선생님을 골려주기로 마음먹고 “전부 운동장으로 나와. 오늘 수업은 제낀다”고 소리치며 교실문을 나섰다. 모든 학생들이 그를 따라 1시간을 신나게 놀고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그 시간동안 선생님은 홀로 교실에서 눈물을 훔쳐야 했다.

싸움을 잘해서 였을까.
“초등학교 이후론 치고 박고 싸워본 기억이 없다.”
공부를 잘했나.
“10등 안에는 들었는데 아주 잘한 편은 아니었다.”
덩치가 컸나.
“고등학교때 우유배달을 하며 부쩍 컸지만 중학교때까진 5번 이하였다.”
야구 최고 스타였군.
“그리 신통한 실력은 아니었다. 공은 빨랐는데 제구는 별로였고 발도 느려 눈에 띄지 못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그의 주위에 사람을 모이게 했던 것일까. 김 감독도 일단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한참을 생각해보더니 “그냥 재미있게 살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생활은 고단했다. 도시락에 밥은 있었지만 반찬을 싸갈 형편은 되지 못했다. 맨밥에 간장을 뿌려가는 것이 전부였다. 친구들에게 보이기 민망해 뚜껑을 조금만 열고 밥을 떠먹곤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계속 해야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우유배달을 했고 생선가게,공사판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즐거웠다. 우유배달을 하며 공짜 우유를 실컷 먹을 수 있어 좋았고 온 몸엔 생선 냄새가 뱄지만 가끔씩 받아 든 두툼한 생선 몸통이 반가웠다. 가난은 귀찮았지만 일을 할때도 괴롭다고 여기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우유를 빨리 돌릴 수 있을까’ , ‘생선뼈를 쉽게 버리는 방법은 뭘까’를 고민했고 하나씩 나아질때마다 그 성취감을 즐겼다.

지금은 생명과도 같은 야구도 마찬가지였다. 동네 공터에서 공놀이 수준으로 시작했지만 공을 던지고 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재미가 있으니 힘든 줄도 몰랐다. 나아지는 자신이 자랑스럽기만 했다. 한번은 좌익수 앞으로 라이너로 안타성 타구를 날리고도 1루에서 아웃된 적이 있었다. 발이 워낙 느렸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경기 후 학교 육상부를 찾아갔다. 주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발이 빨라질 수 있냐.” 육상부 주장은 “내리막길을 뛰어보라”고 권했고 그길로 쉼 없이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달렸다. 이후 좌전안타를 치고 1루서 아웃되는 일은 사라졌다.

김 감독은 “야구가 즐겁다보니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를 이겨야 한다고 했다면 그렇게 많이 뛰지 못했을 것”이라며 “선수들에게 야구를 즐기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즐거우면 귀와 마음이 열리고 더 잘해보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즐거움이 전염됐을 터. 장난은 재미있고 야구는 할수록 늘었으니 주위에 사람이 모일 수 밖에 없었다.

그를 따르는 선수들은 하나같이 ‘열정’을 말한다. “김 감독의 열정을 보면 따를 수 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열정은 즐기는 자에게서 나오는 에너지. ‘리더 김성근’의 비결은 즐거움일런지도 모른다.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김 감독은 LG에서 해임됐다. 분노와 회한이 가득했던 그 즈음 일본에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교토 노인리그에 우리 학교(가쓰라 고교)가 참가하고 있는데 에이스가 없어 고전중이다. 빨리 건너와라. 우리 팀 목표는 우승이다.”

김 감독은 그날 해임 사태 이후 두 번째로 크게 웃었다. 처음은 제자들이 마련한 회갑연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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