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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라이브즈' 관계와 정체성을 탐구하는 심오한 로맨스 [봤어영]

김보영 기자I 2024.02.29 07:00:00

세계가 주목한 데뷔작…서정적 연출·내공깊은 명대사
떠난 사람·떠나보낸 사람·지켜본 사람…인연의 관계성
고향의 언어로 세계를 연결한 정체성에 관한 고백
어색한 한국어는 아쉽…아름답게 담은 고향의 풍경

[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고향의 언어로 세계를 연결한 사랑과 그리움, 뿌리에 관한 고백. 전 세계 유수 시상식을 휩쓸며 오스카까지 넘보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감독 셀린 송)다. 개인의 이야기로 한국의 정서 ‘인연’을 보편적으로 풀어내 세계에 공감을 준 ‘패스트 라이브즈’가 국내 관객과도 공명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3월 개봉을 앞둔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열두 살의 첫사랑 나영(그레타 리 분)과 해성(유태오 분)이 24년 만에 뉴욕에서 다시 만나 끊어질 듯 이어져 온 그들의 인연을 돌아보는 이틀간의 운명적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넘버3’ 송능한 감독의 딸인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장편 데뷔작이다. 한국계 배우 그레타 리와 한국인 배우 유태오, 미국 배우 존 마가로가 각각 나영과 해성, 미국인 남편 아서 역을 맡아 애틋한 서사를 이끈다. 셀린 송 감독은 이 입봉작으로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작품상 후보에 오른 것은 물론, 미국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 작품상과 감독상, 고담 어워즈 최우수 작품상 등을 휩쓸었다.

영화는 어린 시절 첫사랑이었던 나영과 해성이 나영의 이민으로 헤어지는 장면들로 시작한다. 그로부터 12년 뒤 SNS에서 재회한 두 사람이 연락을 이어가다 이별을 겪고, 이후 12년이 또 흘러서야 해성이 미국인 아서(존 마가로 분)와 결혼한 나영을 보러 뉴욕을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꿈같은 추억들을 그린다. 실제 12세까지 한국에 살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셀린 송 감독 본인의 자전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라 더욱 눈길을 끌었다. 셀린 송 감독이 한국에서 놀러온 어린 시절 친구를 남편과 함께 뉴욕에서 만났을 당시,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의 말을 통역해줬던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셀린 송 감독은 자신의 정체성과 역사를 되돌아본 당시의 경험과 정서를 한국적인 개념 ‘인연’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옛 추억을 과거의 시간에 남겨두고 떠난 여성과 행복했던 시절의 인연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남성의 심리를 잔잔하게 섬세히 그려나간다. 떠나는 사람과 떠나보내는 사람의 마음들이 겹쳐 맺힌 그리움과 애틋함, 각자의 공간에서 다시 닿을 날을 기대하는 기다림을 ‘인연’이란 단어로 풀어냈다. 특히 셀린 송 감독의 영리함과 진가는 나영과 해성을 지켜보는 아서의 시선을 함께 녹여냄으로써 드러난다. 해성이 나영의 두고 온 시절 인연이라면, 아서는 지금 나영의 곁을 지키는 현재 인연이다. ‘패스트 라이브즈’가 그리움을 담은 여타 로맨스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존 마가로의 사려 깊은 열연이 아서란 캐릭터의 미덕을 더욱 빛낸다. ‘인연’이란 개념이 생소한 해외 관객들의 눈높이를 대변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나영을 만날 때까지 24년을 망설인 해성보다 아서의 마음에 더 공감이 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은 온전히 느낄 수 없는 나영의 뿌리를 완벽히 함께 경험한 해성을 맞닥뜨린 아서의 소외감과 애잔함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기 때문. 사랑하는 사람의 두고 온 과거까지 이해하고 공감하려 고군분투하는 미국인 남편의 사랑스러움이 뭉클함을 더한다.

자신이 기억하는 고향의 나라 한국을 최대한 한국답게 아름다운 장소로 표현하려 한 셀린 송 감독 노력도 엿보인다. 오르막길에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다정히 붙어 있던 나영과 해성의 하교길, 해성이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동네의 아늑한 고깃집. 뉴욕의 탁 트인 광장과 다른, 정겨움과 세련미가 공존한 한국만의 공간적 개성을 몽글몽글하게 표현했다.

30대의 신인 감독이 쓴 각본이라고 믿기 어렵게, 내공과 성찰을 담은 명대사들이 아련함을 더한다. 해성과 나영이 바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은 둘이 나눈 모든 대화가 명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연의 여운을 엔딩크레딧까지 이끌 수 있던 뒷심은 각본에서 나왔다.

아쉬운 건 배우들의 한국어다. 유태오는 운명에 갇혀 꾹꾹 누른 해성의 그리움과 한을 15년 무명생활을 견뎠던 자신의 경험과 감정에 비춰 깊이 있게 표현했다. 다만 평생을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역할이 무색하게, 어딘가 어설픈 그의 한국말이 훌륭한 눈빛과 감정선을 반감시킨다. 그레타 리의 한국말도 어색하다. 실제 한국인 관객들이 듣기엔 묘하게 낯선 한국어 대사톤으로 호불호를 낳을 수 있다. 다행인 건 그 외 두 사람의 아련한 케미, 존 마가로와 함께한 전반적인 앙상블은 조화롭다. 가수 장기하의 뜻밖의 깜짝 출연이 반가움을 더한다.

3월 6일 개봉. 셀린 송 감독. 12세 관람가. 러닝타임 1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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