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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넷의 노배우는 55년 연기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으며 자신의 시작을 되새겼다. 윤여정은 김기영 감독의 1971년작 ‘화녀’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화녀’가 개봉한 지 50년이 되는 해에 윤여정은 102년 한국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윤여정은 26일(한국시간)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감독 정이삭)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한국 배우의 아카데미 첫 수상이다. 지난해 영화 ‘기생충’에 이어 올해 윤여정이 아카데미 수상을 하면서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인 할리우드에서 한국영화는 또 한번 위상을 높였다.
영화 전문가 및 관계자들은 연이은 아카데미 수상이 코로나19로 침체된 한국 영화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했다. 전혜정 런던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이 미국과 영국에서 한국영화 및 한국영화인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촉매제 역할을 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그 열기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이번 수상이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환기시키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할리우드와 아카데미가 아시아, 더 나아가 글로벌과 연결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수상을 계기로 한국영화, 한국영화인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질 것이고 이러한 움직임이 산업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지난해 감독의 진입장벽이 무너진 것이라면 올해는 배우의 진입장벽이 무너진 것”이라며 “윤여정의 수상은 향후 주연상을 비롯해 전 분야의 도전 가능성을 열어젖힌 셈”이라고 고무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미나리’는 미국과 한국의 협력의 결과물이어서 수상의 성취가 더 빛난다”며 “향후 이런 형태의 작업들이 이어지면 한국 영화산업이 양적으로 더 커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미나리’는 브래드 피트가 설립한 플랜비와 A24에서 제작한 미국영화지만 한국계 미국인 감독이 연출하고 한국계인 스티븐 연, 한국배우 한예리, 윤여정이 출연하는 등 한국적 정서가 짙은 영화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코로나19로 극장 관객이 급감한 상황에서 ‘미나리’는 26일까지 93만명을 모았고, 이번 수상으로 100만명 관객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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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의 수상은 노배우가 일군 성취라는 점에서도 주목한다. 앞서 할리우드에 진출한 젊은 배우들이 있었지만 언어와 인종의 장벽을 쉽사리 뚫지 못했다. 윤여정은 후보에 오른 것도 처음인데 수상까지 거머쥐며 아무도 해내지 못한 길을 개척했다. 전 집행위원장은 “70대의 노배우가 여전히 현역으로 일하면서 큰 무대에서 성취를 일궈낸 모습이 배우로서뿐 아니라 인생선배로서 묵직한 감동을 줬다”며 “세월이 빚어낸 관록과 연륜이 퇴물이 아니라 귀감과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이번 수상이 우리 사회의 문화적 변화를 이끄는 계기가 되면 좋을 것 같다”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