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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이 처음도 아닌데 익호에 대해서 한석규는 유난히 힘들어했다. 연기를 모르는 기자의 눈에는 ‘연기신(神’)의 엄살(?)처럼 보이는 듯도 했다. 한석규가 3년 만에 스크린으로 컴백한다. 오는 23일 개봉하는 ‘프리즌(감독 나현)’을 통해서다. 우리가 아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이나 혹은 ‘낭만닥터 김사부’의 용주처럼 친절하거나 의로운 모습은 없다. 죄수들을 거느리며 눈꼽만큼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 악당 중의 악당으로 분했다. 그런데 그의 첫 등장은 대사도 액션도 없다. 3초 간 눈빛으로 ‘나 이런 사람이야’ 보여줄 뿐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카페 라디오엠에서 한석규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인터뷰는 무려 4년만이다. 익숙하지 않아선지 말이 막힐 때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볼게요”를 시작으로 ‘썰’을 풀었다. 그의 화법은 나직한 음성으로 점잖게 말끝을 늘어뜨리는 말투만큼 개성이 있었다. 적절한 비유를 들고, 그 다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이해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배역에 관한 얘기도 그의 출생으로 시작됐다.
“지금까지 사투리 연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1964년 서울 종암동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에요. ‘베를린’에서 영어로 대사를 한 적이 있는데 제가 사투리를 쓰면 그런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요. 배우면 하기야 하겠지만 내 말이 아니니까 어색하고 불편할 것 같다는 공포심이 있는 거죠. 저한테 익호라는 배역이 그랬어요. 저한테 맞는 옷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저희 일이 안주하면 안 되잖아요. 스스로 도전해보고 싶기도 해서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한 거죠.”
한석규는 ‘프리즌’에 대한 평가는 나중으로 미뤘다. 자신이 출연한 영화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당장은 불가능하다면서 선고(?)를 미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엄격한 편이다. 자신의 최고작으로 꼽는 ‘8월의 크리스마스’도, 평단에선 한국 멜로의 새 지평을 연 영화로 평가를 했지만 그에게는 80점이다. 최근작인 ‘낭만닥터 김사부’에 대해서도 냉정했다.
“‘낭만닥터 김사부’는 저한테는 거부감 없이 수월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작품이었어요. 제가 갖고 있는 것을 그대로 활용하면 됐으니까요. ‘낭만닥터 김사부’를 선택하는 시기에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직업의 목적에 대한 답을 찾을 때였어요. 제 생각에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자신을 완성해가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일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데 연기자가 뭐하는 직업인지 모르겠는 거예요. ‘낭만닥터 김사부’를 통해서 저도 그렇고 각자가 직업에 대해서 고민해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그 고민 끝에 배우가 하는 일에 대해 한석규가 내린 답은 ‘가짜를 통해서 진짜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그에 앞서 ‘가짜’에 얽힌 그의 사연을 한 가지 더 말하면, 가짜 때문에 그는 연기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계기는 2002년 ‘이중간첩’을 촬영 중에 허리를 또 다치면서다. 2003년 두 차례 허리 수술을 받았고 몸을 추스르며 그의 인생에 가장 지독한 경험을 했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적인 괴뢰움이 그를 더 절망 속에 빠뜨렸다.
“그때 제가 하는 일이, 연기가 다 가짜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가짜만 붙잡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회의가 들었죠. 그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내 연기가 가짜 같으니까 상대방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었어요. 가짜의 액션을 받아서 가짜의 리액션을 해야 한다는 게 그때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더군요, 그러니까 스스로가 구차해지고 너무 힘들었어요.”
연기가, 작품이 가짜기는 해도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이나 의미까지 가짜는 아니다. 영화(또는 드라마)가 때로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하고, 영화가 현실에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끄는 순간도 있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제가 하는 이 ‘가짜 놀음’이 꽤 괜찮은 거예요. 우리같은 문화예술계 종사하는 사람들은 가짜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진짜를 얘기할 때 진짜로만 얘기할 수 없고, 어떨 땐 그게 너무 어렵거든요. 그래서 진짜의 이야기를 누가 봐도 다 알아들을 수 있게 (가짜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이제는 가짜로 진짜의 정곡을 찌를 수 있는 작품을 만나기를 기대하죠.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요? 얘기가 길어지는데 결론은 몸이 중요하다는 것,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아프잖아요. 몸과 맘(마음), 단어도 비슷하고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나봐요. 우리가 건강을 조심합시다.”
한석규는 자신의 말이 멋쩍었는지 건강으로 화제를 바꾸며 허허 웃었다. 배우들은 연기의 완성은 없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 연기는 인생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 자신의 인생도 알기 힘든데 남의 인생도 알고 세상까지 알아야 하니 참 버거운 일이다 싶다. 한석규는 30년 가까이 연기를 하고서야 자신의 연기가 봐줄 만한 것 같다고 얘기할 수 있게 됐다. 하면 할수록 조금씩 완성에 다가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계속해서 플레이어가 되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다.
“어느 순간부터 뭔가를 이뤄내고 그런 게 하나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됐어요. 정말 중요한 건 제가 연기를 하는 행위 그 자체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연기를 하고 있는 저는 ‘복이 많은 놈’이에요. 지금처럼 영화든 드라마든 계속해서 하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또 모르죠. 100점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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