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오토in] 카가이 제갈원 기자= 주중에는 세단처럼 편안한 출퇴근용 승용차로, 주말에는 적당한 비포장 노면까지 달려 캠핑과 레저를 즐길 수 있는 차. 바로 ‘도심형 SUV’다.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와 아웃도어 열풍으로 수많은 자동차 브랜드들이 잇따라 실용성과 다목적성, 스타일까지 갖춘 크고 작은 도심형 SUV를 내놓고 있다. 현재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큰 볼륨을 차지하는 그야말로 초인기다.
예전부터 SUV라는 차의 성격은 프레임 바디에 4륜 구동계를 얹고 거친 험로를 주파하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도심형 SUV라는 아예 별도의 장르가 등장하면서 이런 본래 이미지가 많이 희석됐다. 모든 장르는 시작이 있어야 존재하는 법이다. 의외로 그 시작은 우리 가까이에서 이뤄졌다. 도심형 SUV의 원조는 1990년대 초 혜성처럼 등장한 기아 ‘스포티지’다. 이 당시만 해도 기아자동차는 현대차그룹과는 별개의 자동차 메이커였다. 미국 포드와 일본 마쓰다와 기술을 제휴하면서 독자 명성을 쌓을 때다.
1980년대, 세계 SUV 시장은 각진 디자인과 집채만한 덩치를 가진 ‘풀사이즈SUV’가 주를 이루었다. 이 때 기아산업(現 기아자동차)과 소형차 공동제작(1세대 프라이드)으로 제휴를 맺고 있던 미국 포드가 컴팩트SUV 사업을 제안했다. 회사의 성장과 미국 수출길이 열릴 좋은 기회였다. 기아는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사업 진행 시 기아 지분의 50%를 인수한다’라는 포드의 일방적인 갑질(?)에 공동SUV 제작 사업은 결렬되고 만다. 공동개발은 무산되었지만 포드가 제안한 컴팩트SUV 컨셉이 가능성 있다고 생각한 기아는 독자적으로 개발을 하기로 결정한다.
마침내 1991년, 도쿄모터쇼에서 세계 최초 도심형 SUV를 컨셉으로 1세대 스포티지가 등장했다. 아담한 사이즈에 둥글둥글한 디자인, 세단과 다를 바 없는 인테리어, 전에 없던 파격적인 SUV의 등장에 홈 그라운드 일본 메이커는 물론, 미국과 독일 메이커 역시 깜짝 놀라게 된다. 가장 황당한 건 역시 포드였다. 토요타와 혼다는 발 빠르게 스포티지를 벤치마킹 해 ‘RAV4’와 ‘CR-V’등 도심형 SUV를 내놓았다. 제일 먼저 이 컨셉을 내놓았던 포드는 ‘이스케이프’로 뒤늦게 발을 담갔다. 이렇게 스포티지는 이름없는 변방 메이커였던 기아를 세계에 각인시킨 세계 최초의 도시형 SUV로 자리매김을 했다.
당시 기아는 SUV를 제작할 기술력이 뛰어나지 않았다. 말랑말랑한 승차감을 위해서는 승용차에 쓰이던 ‘모노코크’ 바디가 유리했지만 기술력이 부족해 프레임 SUV인 ‘록스타’의 차체를 변형해 사용했다. 의외로 탄탄한 프레임 하체가 무게중심을 낮추어 SUV임에도 날렵한 주행을 가능하게 했다. 아이러니하게 기술력 부족이 승용 스타일에 프레임 SUV의 안정감을 갖춘 차가 탄생한 것이다. 엔진은 승합차용 ‘베스타’의 2.2L 디젤엔진과 수출용으로 ‘콩코드’에 올라가던 2.0L 가솔린 엔진을 장착했다.
스포티지는 출시 전 파리-다카르 랠리에 참가하여 완주해냄으로써 내구성을 입증하기도 했다. 1세대 스포티지는 1993년 출시해 2002년 단종됐다. 내수시장보다 해외시장에서 높은 평가와 판매량을 기록했다. 국내에서는 2.2디젤이 주력이었다. 문제는 베스타에 쓰는 상용차 엔진이라 잦은 불량과 큰 소음과 진동으로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모노코크 바디 SUV가 아니라는 점에서 최초의 도심형 SUV로 볼 수 있느냐를 두고 의견이 갈리지만 도심주행에 최적화된 컴팩트 SUV라는 개발 컨셉을 충실히 따른 것은 분명했다.
스포티지의 현재는 어떨까? 2002년 단종된 스포티지는 2년의 공백기간을 거쳐 2004년에 ‘뉴 스포티지’로 환골탈태했다. 기아가 아닌 현대차의 기술이었다. 당초 1세대 스포티지의 후속으로 개발되던 차량은 ‘쏘렌토’였다. 그러나 큰 차체에 고급장비를 대거 탑재했으므로 스포티지 보다 한 급 위에 포지셔닝 했고 현대가 개발하던 준중형SUV ‘투싼’과 플랫폼을 공유하여 스포티지로 출시하게 된다.
2세대 ‘뉴 스포티지’는 ‘모노코크’ 바디를 사용하여 전작보다 훨씬 부드러운 승차감이 돋보였다. 세련된 디자인과 무난한 동력성능,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무장했다. 하지만 1세대가 개척했던 도심형 SUV 시장은 이미 토요타 RAV4, 혼다 CR-V 등 후발주자에게 빼앗긴 후였다. 그럼에도 전작의 이름을 물려받은 뉴 스포티지는 국내외에서 적잖이 성공했다. 투싼과 비교해 ‘껍데기만 다른 같은 형제 차’ 였지만 국내 소비자들은 이미 익숙한 스포티지 브랜드를 더 선호했다. 한때 판매량에서 수천 대 가량 차이를 내며 투싼을 압도하기도 했다. 2세대 스포티지는 2008년 한 차례 페이스리프트를 거쳐 상품성을 강화해 2010년까지 판매했다. 그 해 3세대 ‘스포티지R’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3세대 스포티지R은 역대 스포티지 중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이다. 뉴 스포티지와 마찬가지로 2세대 ‘투싼ix’와 차체 및 파워트레인을 공유했다. 전작은 곳곳에 형제차 투싼과 닮은 구석이 많았지만 스포티지R은 전혀 다른 느낌의 디자인을 보여준다. 유럽 출신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가 기아차에 입사한 이후 그의 손길이 닿은 차량이다. ‘직선의 단순미’가 돋보이는 특유의 날카로운 디자인이 소비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스포티지R의 ‘R’네이밍은 ‘쏘렌토R’과 마찬가지로 당시 신형 디젤엔진이었던 ‘R엔진’에서 따왔다. 후에 2.0L 직분사 터보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스포티지 T-GDI’를 출시해 이름처럼 스포티한 주행성능을 뽐냈다.
현재 판매되는 모델은 4세대다. 최근 한차례 페이스리프트를 거쳐 ‘스포티지 더 볼드’라는 이름으로 출시됐다. SUV열풍에도 4세대 스포티지는 예전만큼 좋은 판매량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소형SUV가 각광받으면서 중형과 소형SUV 사이에 끼인 애매한 포지션이 됐다. 스포티지 구매를 고민하던 소비자들은 윗급인 쏘렌토나 아예 더 작은 SUV를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출시 당시부터 ‘전작에 비해 디자인이 퇴보했다’는 반응이 적잖다. 3세대 스포티지R의 디자인이 워낙 좋은 평가를 받다 보니 생긴 일이다.
화려하게 등장하여 세계 SUV시장을 발칵 뒤집어 놓은 기아 스포티지. 비록 시장을 선점하지는 못했지만 선구자로서 대한민국 자동차 기업의 ‘한 방’을 보여준 자랑스러운 모델이다. 올해 초 글로벌 누적 판매 500만대를 돌파하며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한편으로 지금의 기아차는 합병 이후 현대차와 함께 혁신보다는 선두를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1세대 스포티지를 통해 현대기아 아닌 '기아'에게도 혁신과 열정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산차가 패스트 팔로워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시장의 개척자로 다시금 활약할 수 있을까. 그들의 도전 정신이 다시금 빛을 발할 때다. 점점 암울해지는 한국 자동차 산업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