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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강'에 밀려 노량진 공시촌 '존폐위기'

이슬기 기자I 2018.05.31 19:09:42

고구려 토마토 등 고시식당 잇따라 폐업
원룸 공실률 20% 이상으로 치솟아
노량진 1·2동 20~30대 인구 6년새 5천명 줄어

29일 오후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는 ‘고구려 고시식당’이 문을 닫은 모습.(사진=이슬기 기자)
[이데일리 이슬기 기자] “계약기간 만료 임박과 수험생 수의 급격한 감소 등의 이유로 부득이하게 운영할 수 없게 됐습니다.”

서울 노량진 ‘고구려 고시식당’이 지난 18일 문을 닫았다. 고시식당은 3000~4000원만 내면 그날 나오는 메뉴를 전부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뷔페식 식당이다. 주로 공무원 준비생 및 고시생 등이 이용해 고시식당이라고 불린다. 고구려 고시식당은 지난 9일 안철수 바른미래당 서울시장 후보가 찾았을 정도로 노량진 공시촌을 대표하는 고시식당이다. 고구려 고시식당 측은 “문을 연 지 8년이 다 됐다”며 “100년 가게로 남으려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영업 종료를 알렸다.

공무원시험 준비생(공시생)들이 노량진을 떠나면서 원룸 공실률이 늘고 고시식당 등 음식점들이 잇따라 폐업하고 있다. 인터넷 강의(인강)의 발달과 확산, 비싼 학원비로 인한 경제적 부담 등의 이유로 노량진을 찾는 공시 준비생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노량진 내 거주자와 유동인구가 감소하면서 공시촌 경기도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29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는 토마토 고시식당이 문을 닫은 모습. 닫힌 문 옆에 영업종료를 알리는 글이 붙어있다.(사진=이슬기 기자)
◇고시식당 잇따라 폐업…원룸 공실률도 치솟아

지난 9일 노량진의 또 다른 고시식당인 ‘토마토 고시식당’도 문을 닫았다. 토마토 고시식당 문 앞엔 “부득이한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영업을 종료하게 됐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토마토 고시식당을 이용했다던 9급 공무원 준비생 김모(27)씨는 “저렴한 가격에 여러 메뉴를 먹을 수 있어 식권까지 끊어 고시식당을 이용해왔다”며 “고구려 고시식당에 이어 토마토 고시식당까지, 노량진에서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식당들도 문을 닫아 충격이 크다”고 말했다.

고시식당들이 잇따라 문을 닫은 것은 공시생들이 줄어든 영향이 결정적이다.

8년간 고시식당을 운영하다 올해 6000원짜리 돼지불고기백반 가게로 업종을 변경한 이모(40)씨는 “고시식당은 재료비가 많이 들어 손님이 많아야 하는 박리다매로 수익이 난다”며 “손님이 예전만큼 많지 않아서 고시식당이 줄이어 문을 닫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넘긴 고시식당은 재작년만 해도 하루에 손님이 1500명은 왔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절반 수준인 700명정도”라고 덧붙였다.

노량진에서 컵밥을 파는 이모(57)씨도 “작년과 비교해 손님이 절반 이상 줄어서 죽을 맛”이라고 토로했다. 이씨는 “공무원 시험을 접수하는 시즌을 제외한 평소에는 노량진에 통 사람이 없다”며 “인터넷으로만 공부하고 학원에 직접 오질 않아서 그런 게 아니겠느냐”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공시생들이 줄어들자 노량진 인근의 원룸 공실률도 치솟고 있다.

노량진 소재 부동산중개업체 대표 장모(60)씨는 “여기서 부동산 한 지 30년이 됐는데 이렇게 공실이 많은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며 “작년이라면 방이 다 찼을 텐데 지금은 한집에 방이 20개 있다면 4~5개는 공실”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부동산 중개업체 대표 최모(51)씨도 “올해 공실률이 작년과 비교해 두·세배는 늘었다”며 “경기가 작년보다 어려워져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까지 올라와서 자취를 하는 게 부담이 큰 것 같다”고 귀띔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노량진 공시촌이 자리한 노량진 제1·2동의 20~30대 인구는 2012년 5만 319명을 기점으로 △2013년 5만 145명 △2014년 4만 8976명 △2015년 4만 8021명 △2016년 4만 6900명 △2017년 4만 5997명 △2018년(4월) 4만 5881명으로 매년 감소하는 추세다.

◇인터넷 강의시장 매년 20~30%씩 성장

공시생들이 노량진을 떠나는 이유로는 국내 경기 둔화로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이 녹록지 않은데다 인강이 발달한 점 등이 꼽힌다.

경기도에서 인강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경찰공무원 준비생 신모(28)씨는 “실강(학원에 직접 나와 수업을 듣는 것)은 2개월 들으면 5과목짜리가 60만원인데 인강은 모든 과목을 무제한으로 들을 수 있는데도 6개월에 50만원”이라며 “인강 아이디 1개를 3명이 나눠쓰면 6개월에 20만원이면 들을 수 있다. 실강과 인강간에 가격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굳이 노량진을 찾지 않는다”고 말했다.

9급 공무원 준비생 김모(26)씨는 “노량진에서 원룸을 구하려면 매달 50만원이 드는데 여기에 공과금이랑 식비 등까지 합치면 월평균 150만원 수준”이라며 “경기가 좋을 때면 몰라도 불황이라 공무원 시험을 처음 준비하는 ‘초시생’이 아니라면 될 수 있으면 집에서 인강으로 공부하려고 한다”고 언급했다.

또 다른 9급 공무원 준비생 박모(27)씨는 “경기가 안 좋다 보니 지방에서 사는 친구들이 예전처럼 서울에서 올라와서 준비할 만큼 여유가 없는 것 같다”며 “노량진에서 어떻게든 버티다가 최근 짐을 싸서 고향 내려가 인강으로 시험을 준비하는 지인이 꽤 있다”고 말했다.

한 공무원시험 학원 관계자는 “인강을 듣는 학생들의 숫자가 실강을 들으러 오는 학생들의 숫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며 “인강 시장은 최근 5년간 매년 20~30%씩 성장해 점점 비중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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