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현장에서]“퍼스트 무버를 육성 대신 고사시키는 정부”

류성 기자I 2020.12.15 17:11:39

퍼스트 무버에게 '악법'된 첨단재생바이오법
세포치료제 상업화 선도업체들만 재허가 의무화
첨단 산업이어서 상업화 못한 대부분 업체는 해당안돼
18년전 세포치료제 허가받은 테고사이언스가 대표적
재허가 받으려면 제품당 2~3년간 비용 10억이상 들어

[이데일리 류성 제약바이오 전문기자] 혁신적 제품이나 서비스로 산업을 선도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는 국가 경제의 성장을 견인하는 선도자로 평가된다. 보다 많은 퍼스트 무버를 키워내기 위해 나라마다 파격적인 지원 정책을 집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퍼스트 무버에게만 불이익을 주는 ‘첨단재생바이오법’ 이 장본인이다. 첨단재생바이오법은 정부가 세포치료제, 유전자치료제 등 첨단 바이오의약산업을 전폭 지원하기 위해 지난 9월 발효한 법이다.

이 법은 시행된지 석달도 되지 않았지만 이미 첨단 바이오 업계의 퍼스트 무버들에게는 태어나서는 안될 ‘악법’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이 법이 퍼스트 무버들에게 악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이전에 허가받은 세포치료제, 유전자치료제는 모두 1년 이내 식약처장에게 다시 허가를 받도록 한 규정 때문이다.

이 규정으로 남들보다 앞서 첨단 바이오 의약품을 상업화한 퍼스트 무버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길게는 20년 가까이 판매해온 치료제까지 재허가를 받아야 하는 처지다. 반면 첨단 바이오 산업은 새로운 분야여서 아직 상당수 업체는 상업화에 성공한 제품을 보유하고 있지않아 재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세포치료제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퍼스트 무버 테고사이언스의 경우 화상 세포치료제인 ‘홀로덤’, ‘칼로덤’, ‘로스미르’ 등 3개 치료제에 대해 식약처로부터 재허가를 받아야 하는 난감한 형편이다. 현재 국내에서 세포치료제로 식약처로부터 허가를 받은 제품은 모두 16개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테고사이언스는 2002년에 홀로덤을, 2005년 칼로덤을, 2017년에 로스미르에 대해 식약처로부터 각각 허가받았다.

첨단재생바이오법이 시행되면서 홀로덤은 18년, 칼로덤은 15년간이나 각각 보고된 부작용 사례없이 판매하고 있음에도 재허가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홀로덤은 그간 중증 화상 환자 800여명에게 치료제로 폭넓게 쓰이면서 안전성과 약효를 입증받고 있다. 칼로덤도 40만개 넘게 판매되면서 국내 대표 화상치료제로 자리하고 있다.

테고사이언스 관계자는 “홀로덤과 칼로덤에 대해 재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1개 제품당 10억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야 한다”면서 “십수년간 아무런 부작용없이 판매하고 있는 제품을 다시 재허가를 받아라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수 없는 일이다”고 하소연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재허가를 받기 위해 식약처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준비하는 데만 최소 2~3년이 걸려 사실상 기한내 서류작업을 끝낼수 없다는 게 회사측 설명이다. 재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제조방법, 시험방법, 위해성 관리계획은 물론 기존 시험방법에 더해 새로운 시험방법도 추가한 서류를 식약처에 제출해야 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식약처는 이런 업체의 어려움에 대해 의견 한번 듣지않고 첨단재생바이오법이 발효되자마자 테고사이언스에 이달까지 허가받은 품목에 대해 재허가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라고 통보했다. 식약처는 테고 사이언스에게 재허가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데만 2~3년이 걸리는 작업을 불과 3~4개월 내에 끝내라고 통보한 셈이다.

테고사이언스는 “식약처의 지침을 지키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기한내 재허가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세포치료제 분야에서 가장 앞서 가는 선도기업들에게만 피해를 주는 첨단바이오재생법의 악법 조항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여전히 국내 기업 대부분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 기업들을 빠르게 모방하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퍼스트 무버는 국내 업계에서 찾기 힘든 귀한 존재다. 아쉽게도 이런 상황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다. 퍼스트 무버를 육성하는정책에 집중해야할 정부가 거꾸로 퍼스트 무버를 고사시키는 정책을 펴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말이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