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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누가 대출규제를 누더기로 만드나

장순원 기자I 2020.07.09 16:36:04
[이데일리 장순원 기자] “중도금 대출이나 잔금대출 조건이 바뀌면서 예상과 달라진 부분에서 억울함이나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은성수 금융위원장)

부동산 대출 규제는 점수를 잃기 딱 좋은 정책이다. 특히나 집을 사면 오르는 게 뻔히 보이는 시장 분위기에서 돈줄을 죄는 정책을 반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금부자만 좋은 일” 혹은 “주거 사다리를 끊는 대책”이라는 날 선 비판이 쏟아진다. 하지만, 금융기관 건전성이나 가계부채, 부동산 시장의 안정성을 고려하면 누군가는 악역을 해야 한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3년간 꾸준히 부동산 대출을 조이는 역할을 했다. 규제 지역으로 묶이면 대출 가능금액을 확 줄이되 실수요자에게는 자금조달 계획이 확 틀어지지 않도록 예외를 허용하는 방향을 유지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게 아파트 잔금대출이다. 아파트를 분양받은 뒤 규제지역으로 지정되면 대출 조건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는 잔금대출은 새 대출이라는 이유로 강화된 규제를 적용하면서도 실수요자나 처분조건부 1주택자에게 중도금 대출(분양가의 60%)만큼은 돈을 빌려줄 수 있도록 하는 원칙을 만들어갔다. 물론 규제의 부작용도 나타났다. 이자를 아끼려 중도금 대출을 쓰지 않았다가 잔금대출 한도가 줄거나 혹은 일부는 자금조달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금융위는 원칙을 고수했다. 규제의 예측 가능성도 높이고 보수적인 자금조달 방안을 마련한 뒤 신중하게 주택구매에 나서라는 신호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선의의 피해자를 만든다는 비판은 감내했다.

그런데 6·17 부동산 대책 이후 어렵게 지킨 원칙이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인천 송도나 검단 등 새로 규제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이 줄자 강력하게 반발했고,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얼마 전 6·17 부동산 대책의 하나인 대출 규제를 손보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사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굵직한 부동산 규제가 나올 때마다 이런 반발이 터져 나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존 규제 지역으로 지정된 곳과 견줘 형평성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정부가 태도를 바꾼 배경은 민심의 변화다. 스무 번이 넘는 대책이 나왔어도 집값은 치솟고 빡빡한 대출규제 탓에 서민은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와중에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 홍남기 경제부총리, 은성수 금융위원장을 포함해 청와대와 내각을 이끄는 고위공직자들은 주택을 여러 채 보유한 ‘내로남불’이 드러났다. 대출 규제의 예외를 넓히는 것은 정부나 집권 여당에 쏟아지는 비판의 화살을 돌려보겠다는 회유책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금융권의 관계자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대출 규제를 통해 투기 수요를 근절하겠다고 해도 영(令)이 서겠느냐”고 되물었다.

원칙 세우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자신이 만든 원칙마저 허문다면 앞으로 대출규제를 내놔도 효과를 보기 힘들다. 반발하면 규제를 풀어줄 것이란 학습효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규제를 손봐야 한다면 무주택 실수요자를 위한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사진=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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