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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美에 끌려가지 말고 설득해야…이게 바로 자국중심 외교"

권오석 기자I 2023.03.02 16:16:13

[만났습니다]①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韓외교, 너무 美 중심…中 불만 가질 것
'젖 먹던 힘'으로 美 설득한 사례에 해법 있어
北, 쇄국주의 도입…남북관계 겨울 길 것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서울 마포구 모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영훈 기자)
[대담 이승현 정치부장·정리 권오석 기자] “대한민국 외교가 미국 중심으로 끌려가고 있다. 우리가 자국 중심성을 갖춰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 전 장관은 최근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의 외교·안보·통일 정책 방향성에 대해 이 같이 조언했다. 그는 장관 재임 중 남북회담 95회를 지휘했고 남북 합의서 73개를 만들어냈다. 남북협력의 상징이라 불리는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개성공단 착공도 그가 키를 쥐고 한 일이다.

대북 전문가로서 정 전 장관은 우리나라가 미국에 편중된 외교에서 벗어나, 이른바 `용미용중`(用美用中)의 묘를 살리는 외교 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우리는 남북관계뿐 아니라 한중, 한일 관계 등 다양한 외교안보 이슈가 산적해 있다”며 “지금까진 미국의 역할이 중요했기에 우리나라도 미국에 의존하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미국에 의존만 하는 것으론 이 문제들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나서서 국익을 보호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정 전 장관이 주장하는 `자국 중심성`이다. 그는 자국 중심성을 발휘한 대표적인 예로, 2002년 김대중 정부 당시 미국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을 들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부시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과의 회담 이후 ‘북한과 대화를 하고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며 전향적인 입장을 발표했다.

정 전 장관은 “(회담 후) 김대중 대통령이 말하길 ‘젖 먹던 힘을 다해 설득했다’고 했다”며 “진심을 가지고 말하면 미국도 우리 말을 들어줄 것이며 그게 자국 중심성”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출간한 `정세현의 통찰(국제질서에서 시대의 해답을 찾다)`에서 이러한 핵심 메시지들을 총망라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서울 마포구 모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영훈 기자)
다음은 정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

-최근 남한 문화 흡수로 북한 내 위기감이 돌고 있다.

△북한은 남한화되고 있다는 걱정이 있다. 정신적으로 남한에 흡수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김정은 체제의 정당성 자체가 도전을 받을 수도 있다. 2020년에는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만들었고, 이달 초에는 평양문화어보호법도 채택했다. ‘우리 사회가 밑에서부터 흔들린다’는 공포 의식에 따라 북한이 쇄국주의로 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 관계 개선, 남북 교류 왕래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에 지금 제일 무서운 건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아닌 남한이다.

-북한이 쇄국주의로 간다면 남북대화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하는가.

△남북 관계는 그간 남북이 주도적으로 해서 풀리기보다는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관계 개선 계기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과거 10·26 및 12·12 사태가 터진 뒤 남한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는 상황이 되니 북한이 놀라서 먼저 총리급 회담을 위한 실무 접촉을 제안했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 문제 등 국제 정세 변동에 따라 북한이 먼저 회담을 제의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남북 관계에도 춘하추동이 있는데 지금은 겨울이다. 반대로, 미국이 북한과 대화 국면으로 넘어가는 게 대중(對中) 압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먼저 움직일 수도 있다. 그땐 우리가 먼저 치고 나가야 한다.

-언제까지 겨울일까.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남북 당국이 누가 먼저 액션을 취하느냐에 달렸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만 놓고 보면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다. 특히 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당하는 걸 본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핵 포기 대가로 안전 보장을 약속했지만 결국 핵이 없으니 러시아 침공을 받은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핵이 있었다면 러시아가 함부로 침공을 할 수 있었겠나. 북한 역시 체제 보장을 위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예단할 수 없지만 지금으로 봐선 겨울이 길 것 같다.

-현 정부가 이런 난국을 어떻게 극복해나갈지 조언해 달라.

△남북 관계의 관건은 미국을 설득해 대화의 장으로 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북핵 문제 해결이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적극 설득해야 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서울 마포구 모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영훈 기자)
-어떻게 설득할 수 있나.

△과거 2000년대 초반 개성공단 사업을 시작할 때, 미국 국내법이 발목을 잡았다. 당시 미국의 `대(對)적성국 교역법`에 따라 미국 기술이 10%만 들어가 있어도 그 기계가 북한에 들어가려면 미국 상무부의 심의를 받아야 했다. 개성공단에 들어가는 기계나 재봉틀에는 미국 기술 많이 들어가 있었다. 전 통일부 장관인 조명균 당시 교류협력국장이 미 상무부에 ‘개성공단은 특별한 경우니 승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안 된다’는 답변이 왔다. 이에 미 상무부에 직접 가서 재차 요청했으나 또 안 된다 하더라. 이렇게 두 번 퇴짜를 맞고 보름 뒤에 조 국장을 다시 보냈고 결국 미국의 동의를 얻었다. 삼고초려로 결심을 얻은 것이다. 우리가 성의를 다해서 설명하면 미국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진심을 다해 설득해 입장을 바꾼 사례도 있다. 2002년 1월 당시 미국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연설을 했었다. 그날은 내가 통일부 장관으로 발령을 받은 날이기도 했다. 그해 2월 19일에 부시 대통령이 방한해 청와대에서 100분 간 단독 정상회담을 한 후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이 연설을 했다. 그때 부시 대통령이 ‘나는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 김대중 대통령의 권고를 받아서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고 하더라. 악의 축인 북한과 대화를 하고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김 대통령이 어떻게 설득했다고 하나.

△김 대통령이 ‘젖 먹던 힘을 다해 부시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앞서 `삼고초려` 성공 사례와 `젖먹던 힘` 선례 등을 보면, 적극적으로 설득하면 미국도 우리 말을 들어준다. 그게 자국 중심성이다. 대한민국 외교안보 당국자라면 미국을 향해 ‘한국에서 미국에 대한 우호적 여론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 정부를 무시한다고 하는 반미여론이 확산되면 되겠냐’고 미국에 협박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책을 낸 이유도 이같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인가.

△대한민국 외교가 미국 중심으로만 끌려가고 있다는 나름의 고민에서 냈다. 자국 중심성을 갖춰야 한다. 너무 미국 중심으로 가면 중국이 불만을 가질 것이다. ‘좁은 도랑에 들어간 소가 오른쪽 둑의 풀도 뜯어 먹고 왼쪽 둑의 풀도 뜯어 먹는 것처럼 미국, 중국 관계를 모두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한 김대중 대통령의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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