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체류권은 남편 손에…가정폭력 시달려도 말 못하는 결혼이주여성

최정훈 기자I 2019.07.08 15:48:47

폭행·욕설·성폭력 당해도 체류권 박탈될까 신고못해
이주여성 전문상담소 지난달부터 한 곳 운영중
이주여성 가정폭력 실태 파악도 미흡
"미국처럼 학대 당한 이주여성 체류권 보장해야"

베트남인 아내를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남편 A(36)씨가 8일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최정훈 기자] 전남 영암에서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 A씨가 남편으로부터 무차별 폭행당한 사건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고 있다. 하지만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폭력이 이번 사건처럼 드러나지 않았을 뿐 비일비재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배우자에게 체류권이 종속된 이들은 배우자의 폭력에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는 게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이번 사건은 A씨의 폭행 동영상이 인터넷을 퍼지면서 여론의 공분을 샀지만 결혼이주여성이 배우자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사건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7년 결혼 이주 여성 92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명 중 4명이 가정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피해자 중 81.1%는 심한 욕설 등 언어적 학대를 당했고 △한국식 생활방식 강요(41.3%) △폭력 위협(38%)△생활비 미지급(33.3%) △성행위 강요(27.9%) △부모·모국 모욕(26.4%) 등이 뒤를 이었다. 법무부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국내 결혼 이주 여성은 13만 227명이다.

2017년 결혼이주여성 가족폭력 경험유무 현황(표=국가인권위원회 제공)
◇폭력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체류권에 발목 잡혀 신고도 못 해

그러나 가정폭력이나 성폭력을 경험한 이주여성들은 외부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2017년 이주여성 성폭력 상담 현황을 보면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의 상담 중 성폭력 피해 관련 상담은 전체의 3%에 그쳤다. 인권위 조사에서도 가정 폭력 경험 이주 여성의 31%는 관련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헌법 제6조 2항에서 외국인의 기본권을 인정하는데도 이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유는 외국인 체류권이 배우자에게 종속돼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사연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베트남 출신의 결혼이주여성 B씨는 시아버지로부터 강간을 당한 뒤 신고했다. 형사재판 진행 중 베트남에서 아동기에 성폭력을 당해 출산을 한 사실이 드러나 한국인 남편이 혼인취소소송을 제기했고 그녀는 취소 판결을 받았다. 이후 체류 기간 만료해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 출신 C씨는 남편이 자녀 양육을 도우러 한국에 온 자신의 여동생을 강제 추행한 사실을 알았지만 아이들 양육을 위해 남편과 이혼할 수 없었다.

현행법에서는 결혼이민을 한 지 1년째에 비자 연장을 하거나 2년째 영주권 신청을 하려면 한국인 남편의 신원보증이 필요하다. 국제결혼의 대부분이 중개업체를 통해 속성으로 이뤄져 혼인파탄을 가져올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남편이 아내를 추방할 권력을 가진 것이다. 남편이 사망·실종되거나 남편의 잘못으로 이혼하면 국내에 머물 수 있지만 외국인인 이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현행법에 대해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시정 권고를 내리기도 했지만 아직 변화는 없다.

지난 5일 A(36)씨가 베트남 이주 여성인 B씨를 폭행하고 있는 영상.
◇갈 길 먼 결혼이주여성 폭력 대책…“학대 이주여성 체류권 보장해야”

정부도 폭력을 경험한 이주여성에 대한 대책 마련에 서두르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가정폭력 피해를 본 결혼이주여성들이 전문적인 상담과 법률지원 등을 받을 수 있는 이주여성 상담소가 지난달에서야 전국 최초로 대구에서 문을 열었고 지난해 11월 정부가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가정폭력 방지 대책’도 아직 입법 과정에 있다.

결혼이주민여성의 가정 폭력에 대한 실태도 파악이 안 되는 실정이다. 여성가족부가 3년마다 실시하는 실태조사에서 국제결혼이 포함된 건 2010년 한 번뿐이다. 여가부 관계자는 “실태조사를 실시할 때 다문화가정 표본이 적어 신뢰성이 떨어져 파악하지 못했다”며 “올해부터는 신설되는 이주여성상담소를 통해 지역별로 실태 파악에 나설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상담기관의 활성화와 함께 체류권 의존 문제의 빠른 해결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강혜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공동대표는 “결혼이주여성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기관을 모르는 경우도 많아 기관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도 절실하지만 결국 체류권 의존 문제가 가장 시급한 문제”라며 “미국의 경우 가정 폭력을 당한 이주 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VAWA 자기청구권으로 이주 여성을 보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VAWA 자기청구권은 배우자에게 학대당하는 이주여성에 대해 가해 배우자의 도움 없이 영구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다.

강 대표는 이어 “상담소 활성화와 체류권 의존 문제 해결은 시급한 과제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다”라며 “결국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인종 차별이 해소돼야 결혼이주여성의 인권 사각지대는 사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