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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만에 사라지는 낙태죄…입법 공백 앞두고 혼란 여전

박순엽 기자I 2020.12.31 15:56:24

새해 ‘낙태죄’ 형법 조항 효력 상실…입법 공백 현실화
여성계 “처벌의 시대 끝”…인권위 “낙태 非범죄화해야”
국회 국민청원엔 낙태죄 찬·반 모두 10만명 동의 몰려

[이데일리 박순엽 기자] 2021년 1월 1일 0시를 기점으로 ‘낙태죄’ 관련 형법 조항은 효력을 상실한다. 지난 1953년 형법 제정 이후 우리 사회에서 67년간 이어진 낙태죄가 사라진다는 의미다.

하지만 새해를 앞두고 낙태죄에 대한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국회의 대체 입법이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의료계 일부에선 입법 공백을 앞두고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반면, 여성계는 낙태죄 폐지를 반기면서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형법상 ‘낙태죄’ 사라져…그러나 혼란은 여전

형법상 낙태죄가 67년 만에 사라진다. 앞서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4월 형법 제269조 제1항의 자기 낙태죄와 제270조 제1항의 의사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헌재는 2020년 12월 31일을 관련법 개정 시한으로 뒀지만, 국회가 대체 입법 마련을 미루면서 내년 1월 1일부터는 낙태죄와 관련한 형사처벌을 할 수 없게 됐다.

정부는 지난 10월 임신 14주 이내까지 조건 없는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의 형법·모자보건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임신 초기인 14주 이내에는 임신한 여성이 자기 의사에 따라 낙태를 결정할 수 있고, 15~24주 이내에는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으면 ‘조건부’로 낙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국회가 대체 입법을 하지 못하는 동안 낙태죄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낙태죄 폐지 찬성과 반대를 요구하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은 모두 10만명의 동의를 받아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로 넘어갔다. 염수정 추기경은 “법적 공백에 따라 임신의 모든 과정에 걸쳐서 태아의 생명을 전혀 보호할 수 없는 법적 공백이 생기게 된다”고 우려를 표했다.

아울러 의료계는 당장 벌어질 현장에서의 입법 공백을 걱정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지난 28일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고 “전문가 단체의 의견을 반영해 (관련 법안을) 신속히 개정하기를 원한다”면서 “아무 조건 없이 임신한 여성의 낙태는 10주 미만에만 시행하고, 정부와 입법부는 의사의 낙태 거부권이 명시된 낙태법을 만들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밝혔다.

지난 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낙태죄’ 개정과 관련해 이흥락 로고스 변호사 등 전문가들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여성계 “처벌의 시대는 끝…낳지 않을 권리도 보장”

반면, 여성계는 형법상 낙태죄의 효력 상실을 환영하고 나섰다. 시민단체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모낙폐)은 3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와 국회는 여성 존엄을 침해하는 낡은 법에 매달린 구시대 망령에 현혹돼선 안 된다”며 “여성의 존엄과 권리를 위해 안전한 임신중지와 재생산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모낙폐는 낙태죄 효력 상실에 대해 “단순히 개정입법 시한을 넘기는 방식의 비(非)범죄화가 아니라 보다 명확하게 권리를 보장하는 입법적 진전을 이루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라면서도 “임신중지와 재생산 권리를 제약하고 있는 나라가 많은 현실에서 한국은 처벌 없이 새로운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들 단체는 △유산 유도제 공적 도입 △임신중지 관련 의료 행위 건강보험 적용 △의료현장 실태조사 진행 △‘낳을 권리’·‘낳지 않을 권리’ 보장되는 교육·노동환경 마련 △피임접근권 강화 △임신중지로 인한 차별·사회적 낙인 해소 △형법상 낙태죄 전면 삭제 등들 함께 요구했다.

한편 이날 국가인권위원회도 낙태에 대해 비범죄화하라는 의견을 국회의장에게 전달했다. 인권위는 “낙태죄는 낙태 감소라는 목적 달성보다 낙태가 불법이란 인식에 따라 여성에게 안전하지 못한 낙태를 선택하게 한다”면서 “낙태에 대한 새로운 장벽을 도입하는 방식이 아닌 여성이 임신·출산 전 과정에서 국가의 의료적, 사회적 지원을 통해 실질적으로 자기결정권, 건강권 등을 행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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