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과 인근에서 쉽게 갈 수 있는 식물원이 많아 졌고 식물원에 각종 식물이 자라고 있다. 귀화식물의 이름을 잘 모르는 것은 그러려니 하는데, 우리 산야에서 전래부터 자생하고 있는 식물의 이름도 태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조금 부끄럽다. 이전 직장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친 동료와 함께 근무했다. 그 친구가 각종 야생 식물과 꽃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놀랐고, 중등과정을 소위 정규과정대로 마친 저나 다른 동료들이 주변의 식물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무지하다는 사실에 많이 부끄러웠다. 10대 나이에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이나 송성문의 ‘정통종합영어’를 공부하는 시간을 조금 아껴 우리 주변의 동식물에 대하여 조금 더 공부했으면 더 행복했을 것 같다. 그러면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대하여도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갖게 되었을 것 같다면 논리의 비약일까.
여름 꽃을 좋아한다. 특히 능소화, 배롱나무 꽃, 물푸레나무 꽃을 좋아 한다. 우리 산야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고 꽃도 예쁘지만 오래 피어 있어 좋다. 봄꽃이 화려하지만 쉬 지는 것에 비해 여름 꽃은 소박하지만 오래간다. 봄꽃이 도시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패션모델과 같다면, 여름 꽃은 시골 누님과 같다. 봄꽃이 계절의 변화를 알리며 화려하게 등장하였다고 요란하게 사라진다면, 여름 꽃은 어느 결에 소리 없이 왔다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뒤 말없이 떠나간다. 봄꽃이 화려한 잉태(孕胎)를 상징한다면 여름 꽃은 포태(胞胎)의 인내를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능소화를 좋아 한 것은 서울에 올라 온 뒤 한 참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높은 담벼락 위에 건물을 지은 대학 건물이 있었고, 출퇴근길에 그 앞길을 지나쳤다. 어느 여름날에 그 앞을 지나다가 그 담벼락에 모진 목숨을 부지하고 피어낸 소박한 능소화를 보았고, 그 해 여름 내내 그 꽃과 함께했다. 그 후 고향을 찾았다가 고향에도 능소화가 많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서 성장하면서도 그 꽃의 존재를 그 때까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곁에 있지만 우리가 존재를 모르고 있는 꽃이 얼마나 많을까. 배롱나무는 고향 뒷산 누군가의 묘소 주변에서 심어져 여름 내내 피어 있었다. 고인의 외로움을 함께 하는 듯 하여 못내 애처로웠다. 모정(茅亭) 옆에서나 피던 배롱나무 꽃이 이제는 서울 부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객지에서 뿌리 내리고 적응하기 위해 무진 애쓰는 출향민을 보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출향민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정착하여 살면 그곳이 고향이 되는 것이니, 배롱나무도 이제는 서울 나무가 된 것이다. 물푸레나무 꽃은 파스텔 톤이다. 부드럽고 엷은 색조가 마음의 안정을 준다. 우리 집 앞 천변에도 열병식을 하듯 줄지어 피어 있다. 천변을 산책할 때마다 안온한 느낌을 주어 편안하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 인사들이 묵은 자리를 메꾸고 있다. 여름 꽃처럼 조용히 우리 곁에 있다가 새롭게 소임을 받는 분들도 있고, 봄꽃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등장하는 분들도 있다. 모두 풍성한 결실을 맺기를 기대하여 본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그들도 계절이 바뀌면 여름 꽃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