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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는 임정 군사위원회 특파단으로 서안에 파견돼 모병과 훈련 임무를 맡았다. 이듬해 창설된 광복군 제1지대장으로 임명됐으며, 1941년 광복군 제1징모분처 주임위원으로 활동했다.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 참모로 임명된 선생은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도 선출됐다. 정부는 항일 전선에서 무장투쟁을 펼친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아울러 보훈처는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미 해군 대위를 ‘9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쇼 대위는 미국인 선교사 부부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미 해군에 입대해 제2차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전했던 그는 1947년 전역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이 조선 해양경비대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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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50년 9월 적 후방 정찰을 위해 서울 녹번리에 접근하던 쇼 대위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매복조의 공격을 받아 28세에 전사했다. 우리 정부는 쇼 대위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고, 미국 정부는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1419년 쓰시마섬 원정으로 왜구를 격퇴한 이종무 장군을 ‘9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1360년 태어난 장군은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21세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해 그 공으로 정용호군이 됐다.
1419년 왜선 50여척이 충남 서천 비인현의 도두음곶에 침입해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자, 조정은 장군에서 쓰시마섬 정벌을 명했다. 장군은 쓰시마섬에 상륙해 적 선박 129척과 가호 1940여 호를 불태웠으며 적 144명을 참수하는 대승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