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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영국 배우를 써 작품 만들었을 때 실패했다. 언어와 신체성, 즉 몸의 표현들이 아시아인과 달랐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서울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호텔. 연극 ‘무사시’ 내한공연 간담회 도중 일본의 연극거장인 니나가와 유키오(79)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 나선 단상 옆으로 걸음을 옮겨 말 타는 자세를 취했다. 아시아인과 서양인의 신체 언어 표현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조용하던 장내에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영국배우들은 무릎을 굽혀 서 있는 자세를 10분 이상 못하더라.” 니나기와는 무릎을 굽힌 채로 설명을 이어갔다. 팔순을 앞둔 노장의 열정이다. 니나가와는 셰익스피어 작품에 일본색을 입힌 독창적인 접근으로 정평이 난 연출가다. 그의 낯선 작업 방식과 연출론에 대한 질문이 거듭되자 간담회 도중 직접 일어나 행동으로 이해를 도운 것이다. 오는 5월 내한이 유력한 비틀즈 멤버 폴 메카트니(72)가 간담회 도중 직접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게다가 정적이고 격식 차리기로 유명한 일본인 아닌가. 이날 니나가와의 모습은 좀처럼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말도 남달랐다. 니나가와는 배우 설명에도 농담을 섞었다. 21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연극에는 후지와라 타츠야와 미조바타 준페이 같은 청춘스타들이 출연한다. 이중 후지와라와 연출가의 인연이 특히 깊다. 후지와라를 열네 살에 발탁해 무대에 세운 후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등의 작품에 출연시킨 이가 바로 니나가와다. 그는 후지와라에 대해 “압축적인 연기를 잘 표현한다”면서 “물론 후지와라가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연기를 위해) 내 옆에 있겠다고 한 건 내 책임은 아니다”라고 말해 분위기를 띄웠다.
니나가와는 교류를 중요하게 여기는 연출가다. 그는 55세 이상 일반인으로 꾸려진 시니어극단 골드시어터와 10~20대가 주축을 이룬 넥스트시어터를 운영하고 있다. 니나가와는 “내가 재떨이를 던진 때도 있었지만 이젠 물건은 안 던지고 (단원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그동안 심장병을 두 번이나 앓았는데 두 번 다 이 극단을 가르치며 생긴 일”이라며 웃었다. “예전보다 아주 조용해지고 조용한 작품을 만드는 연출가가 됐다”는 농담도 덧붙였다.
연출관도 독특했다. “공연 3분 안에 사로잡아야 한다”는 게 니나가와가 밝힌 연출 철학이다. 이유가 뭘까.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해” 내린 결론이다. 니나가와는 “나를 봐도 극의 세계에 빠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런 데 불만이 있었고 극장에 오는 관객들이 어떤 마음으로 오는지 생각해 봤다”며 “직장에서 일을 끝내고 오는 사람들, 연애를 하다 오는 사람들 모두가 3분 안에 극의 세계에 빠지게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보는 연극’을 중요시하는 연출가답게 ‘무사시’에도 서정이 흐른다. 니나가와는 “대나무가 절의 마루와 마당까지 소리 없이 이동하는 장면에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당부했다. “1분은 괜찮지만 2분까지는 지각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귀띔도 했다. “니나가와 천재”라는 문패를 집에 걸고 자신을 채찍질했다는 괴짜 감독. 직접 만나보니 작품이 더욱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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