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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세상, 선명한 진실

오현주 기자I 2012.06.20 16:38:23

노정하 `보이지 않는 것에 묻다` 전
핀홀 기법 통해 빛 조절
사라져가는 이미지 담아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6월 20일자 35면에 게재됐습니다.
▲ 노정하 `아틀리에`(2008)(사진=성곡미술관)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오늘도 세상의 카메라들은 해상도 경쟁에 여념이 없다. `선명하게` `깨끗하게`에 사활을 건다. 그리곤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더욱 또렷하게 비추고 본 것을 토해낸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진실인가. 역으로 이런 접근도 가능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정말 없다고 할 수 있느냐는 거다. 다시 말해 보이는 것만 진실인가 말이다.

사진에 대한 다소 이중적인 탐구는 중견 사진작가 노정하(46)의 몫이다. 사진이 반드시 선명하게 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 또 사라진 이미지들을 흔적처럼 담아낼 수는 없는가를 고민한 시도가 연결됐다.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에 펼친 `보이지 않는 것에 묻다` 전은 작가의 문제의식이 분명하게 담긴 전시다. 사진 고유의 속성인 기록성과 진실성을 묻고, 우연성을 바탕으로 인간 사는 일과 운명을 들여다봤다. 영상을 포함한 38점 사진작품을 통해서다.

전시장에서 먼저 마주치게 되는 건 `초상작업`이다. 중세 어느 명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여인의 동화적 이미지, 수정공을 든 다른 여인이 만들어낸 우수적 분위기는 모두 작가 자신이다. 대부분의 사진작가들이 그렇듯 그도 스스로를 찍는 행위로 사진세계에 발을 들여놨다. 1999년부터 2006년까지 꾸준하게 이어온 `셀프` 시리즈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개인에 대한 초상작업은 최근 영상과 결합돼 집단초상으로도 확장됐다. 이른바 `모션포토`다. 빠른 시간동안 무작위로 캐치한 장면들을 연결, 한 컷 한 컷 영상으로 만든 뒤 이를 다시 연결했다(`PS1`). 이와 반대되는 모션포토도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작가가 관찰한 풍경에서 어떤 대상이 포착되고 사라지는 그 움직임을 잡아낸 영상(`여름휴가` 시리즈)이다. 촬영과정이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세계도 서서히 바뀐다.

▲ 노정하 `PS1`(사진=성곡미술관)
무엇보다 작가를 우뚝 세운 건 핀홀(pinhole) 작업 덕이다. 상자에 뚫린 조그만 구멍과 아날로그 필름만으로 이미지를 얻는 기법을 말한다. 빛을 수동으로 조절해가며 한 작품에 15분씩 걸려 만들어진 작품들은 흡사 우리 눈이 느낄 피로도와 다르지 않다. 작은 구멍에 집착할수록 주변은 흐릿해지고 또 빛이 충돌하면 본래의 형체를 잃기도 한다. 전시에선 `아틀리에` 시리즈(2008), `베니스 리알토의 커플`(2010) 등 핀홀 카메라로 제작된 11점을 선뵌다.

작가의 8번째 개인전이다. 지난해 성곡미술관이 선정한 `내일의 작가` 수상 기념전으로 마련됐다. 사진이지만 다분히 회화적으로 보이는 건 작품 안에 문학을 가미한 까닭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론 자신을 묻는 작업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서 `나`를 어디에 두느냐는 문제 말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진실은 바뀔 수도 있다. 작품들이 그렇게 말한다. 7월29일까지. 02-737-7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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