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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더 이상 전진하지 않는다 - 신탄리 고대산(高臺山)

조선일보 기자I 2008.11.21 13:47:31

박종인의 여행편지 11




[조선일보 제공] ▲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신탄리로 간다. 거기에 고대산이 있다.

철도의 종착점, 신탄리

기차는 외롭다. 거대한 공룡처럼,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무작정 전진한다. 경기도 동두천에서 연천 신탄리까지 오가는 통근열차. 40분 남짓한 짧은 여정 동안 객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말이 없다. 멀리 산줄기와 동행하며 논과 밭 사이를 지난 기차가 신탄리에 멎는다.

▲ 신탄리역

모든 기차는 신탄리 너머로 전진하지 않는다. 조금만 더 가면 남방한계선. 서울에서 출발한 경원선 열차는 신탄리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 철도 중단역.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어가 붙어 있는 역이다. 갑자기 찾아온 겨울 햇살에 사람들은 손을 비비며 걸음을 재촉한다. 시간이 멎어 있는 예쁜 신탄리역을 사방에서 산이 에워싸며 위로한다. 기차가 멎은 곳, 거기에 산이 있다. 고대산(高臺山)이다. 산에 오르면, 등산로를 따라 철책 너머로 입김을 내뿜으며 벙커 속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젊은 병사들을 만나게 된다. 맑은 자연(自然)과 냉혹한 전쟁의 흉터가 병존하는 기이한 산, 고대산의 겨울로 들어간다. 산의 주제는 ‘겨울’이다. 

▲ 고대산

▲ 고대산

기차로 떠나는 산, 고대산

서울에서 갈 경우, 고대산까지 기차를 두 번 타면 된다. 승용차를 타면 오고가며 드는 체력과 시간이 엄청나지만, 지하철 1호선으로 동두천역까지 간 뒤 동두천~신탄리 통근열차로 갈아타면 두 시간이면 된다. 왕복이래봤자 5000원 남짓이니 교통비 절감이 두번째 이유요, 신탄리역에 내리면 바로 등산로로 오를 수 있으니 그 막강한 효율성이 세번째 이유다.

역사를 나오면 왼편에 ‘고대산 500m’라는 간판이 보인다. 무시하자. 대신에 오른쪽으로 꺾으면 건널목이 나오니, 그 건널목을 건너 길을 이으면 등산로 입구까지 5분이다. 신석기 유적이 있는 연천인지라, 등산로 입구에는 원시인을 본딴 캐릭터 둘이 서 있다. 이들을 지나 매표소 앞에서 길이 갈라진다. 오른쪽은 제1등산로, 왼쪽은 2, 3등산로로 가는 길이다. 세 길이 모두 성격이 다르지만 모두 정상까지 왕복 4시간은 잡아야 한다. 요즘처럼 해가 짧고 추운 때에는 정말 일찌감치 올라서 일찌감치 내려와야 목숨 부지하는 데 이롭다. 올 가을 들어 가장 추웠던 어제, 11월 18일. 죽는 줄 알았다.

▲ 까치들도 추워서 감히 날아오르려 하지 않았다

낙엽송과 암벽의 조화

등산로 선택을 놓고 고민하다가 제2등산로 코스를 고른다. 폭신폭신한 낙엽송 숲길에서 시작해 적당히 거친 돌밭을 오르는 코스다. 코스가 박진감이 넘치기에 세 개 등산로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다. 개울을 따라 상가를 지나 5분 정도 가면 이동식화장실이 있는 공터가 나온다. 등산로는 거기에서 시작이다. 산 속으로 돌계단이 나 있고 그 뒤로 낙엽송 숲이 나 있다.


▲ 낙엽송림이 하늘을 가린 등산로 초입

낙엽송이 뭔가. 소나무는 소나무이되 가을이면 색을 바꾸고 잎을 떨구는 소나무다. 장장대대한 그 높은 키에서 비늘처럼 떨어지는 잎들이 숲 속을 온통 포근한 카펫으로 만들어놓았다. 폭신폭신한 낙엽송잎을 밟고 길을 잇는다.

▲ 어둠이 오기 전, 사람들은 서둘러 산을 빠져나갔다

낙엽송 숲을 빠져나오면 신기하게도 얕은 능선 위에 벤치가 하나 앉아 있다. 딱 숨을 헐떡이게 되는 시점이다. 거기에 앉으면 뒤쪽으로 3등산로가 나오고, 2등산로는 왼쪽이다. 왼쪽. 갑자기 경사가 확 높아지는 칼바위다. 통나무 계단을 지나 참호와 벙커를 뒤로 하고 길을 잇는다. 낙엽들이 늪처럼 쌓여 있는데, 등산화 제대로 신고 있지 않으면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낙엽들을 들추면 하얗게 서리가 끼어 있으니 잘못하면 몇 미터씩 미끄러질 판이다.

▲ 산 한가운데에서 벤치 하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목들은 비명을 지르는데

계단이 끝나고 10분 정도 더 걸어가면 말등바위가 나타난다. 그 바위가 보이면 긴장할 것. 이제 바위들이다. 신탄리쪽을 바라보는 말처럼 생겼다고 말등바위다. 말등바위 직전에 작지만 제법 가파른 바위가 나타나니 조심하자. 거기에서 한숨 돌린다. 앞으로 보이는 조망이 좋다. 나뭇잎을 다 떨어뜨린 나목(裸木)들이 겨울 바람에 비명을 질러댄다. 문득 눈을 들어보면 사방이 산줄기다. 여기에서 숨을 ‘제대로’ 돌리시라.

▲ 나목숲

▲ 나목숲

10분 정도 편안하게 오솔길을 걸으면 앞을 가로막는 뭔가가 있다. 30m짜리 급경사다. 로프가 묶여 있으니 있는 힘을 다해 급경사를 올라가면 이번에는 소나무 숲이다. 그리고 또 10분 정도 가면 30m짜리 급경사가 하나 더 나오고 그 뒤로 또 하나 더 나온다. 자, 여기에서 큰 심호흡! 150m짜리 낭떠러지가 앞을 막는다. 양 옆으로 설치된 굵은 로프 덕분에 그렇게 위험한 정도는 아니지만, 처음 본 사람들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다. 양쪽이 낭떠러지니, 그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그 끝에 나오는 전망 바위에서 물 한 모금 마시며 벌렁대는 가슴을 진정시키시라.

거기에서 고대봉 정상까지는 약 1km 정도다. 지난 봄 붉게 타올랐을 진달래 군락지를 지나면 고인돌바위라 이름 붙은 바위를 지난다. 20분 뒤 제1등산로와 만나는 대광봉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이정표를 따라 20분을 더 걸으면 정상이다. 맑은 날이면 개성 송학산도 보인다.

겨울에서 겨울로, 그리움에서 그리움으로

산꼭대기에 오르는 이유는 저마다 다 다르지만, 고대산에 오르는 이유 가운데 상당수가 바로 이 송학산 바라보기다. 얼토당토 않는 현실 때문에 ‘그저 바라볼 수 만 있어도 좋은’ 개성 땅이 아닌가. 하지만 개성을 마주하려면 하늘이 좋은 날씨를 내려줘야 하니, 꼭 이것만 바라고 가서는 아니되겠다.

▲ 오후 햇살에 장엄하게 모습을 드러낸 산줄기들

▲ 지난 계절의 흔적, 그리고 겨울의 앙상함이 함께 했다

▲ 다람쥐 꼬리 만한 햇빛을 붙잡았다.

▲ 당신은 얼마나 추우신가요?


::: 여행수첩

가는길(서울 기준):지하철 1호선을 타고 동두천역에서 하차. 개찰구를 나가서 매표소에서 신탄리행 통근열차표를 구입할 것. 1000원. 동두천역에서 신탄리역까지 40분. 매시 50분 출발. 신탄리에서 동두천까지는 매시 정각에 출발. 요즘 철도공사가 파업 중이라 정상적일 때보다는 출-발착이 정확하지 않다.

먹을 곳:등산로 입구에 식당들 많다. 특히 신탄리에는 보신탕집이 몰려 있어, 이를 찾아 일부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 선택은 자유.

주의사항:군사분계선 남방한계선이 가까운 곳. 철책이 쳐져 있는 곳은 절대 출입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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