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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mp 2020)(금융 영토 확장)④`리먼을 인수했다면..`

좌동욱 기자I 2010.03.22 11:10:00

인수합병(M&A)으로 금융산업 벽 넘는다
지역 확대 넘어 사업 다각화 경쟁
글로벌위기후 사업포트폴리오 전략 보수화
[이데일리 창간10주년 특별기획]

[이데일리 좌동욱 기자] `산업은행이 좌초 직전에 있던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했다면`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국내 은행들의 해외진출 방향성에 대해 여러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국내 은행들이 그동안 진행해 왔던 보수적이고 점진적인 해외 진출 전략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례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은행이 한때 세계 금융시장을 호령했던 내로라하는 투자은행을 단숨에 인수하느냐 마느냐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던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만 해도 적지 않은 국내 금융권 인사들은 "베팅할 만한 모험"이라고 평가했다. 인수·합병(M&A)를 주도했던 민유성 산은금융그룹 회장은 "성공했다면 산업은행의 평판은 지금보다 몇 배 높아졌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는 `후폭풍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우세한 편이다. 특히 금융당국 관계자들은 "인수했다면 위험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리먼이 파산하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민 회장은 국회에 불려가 리먼을 인수하려 했던 것에 대해 추궁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들을 요약해 보면 둘중에 하나다. 산업은행, 더나아가 한국의 금융산업이 절호의 기회를 놓쳤던가, 아니면 국가 리스크를 높일 만한 큰 위기를 넘긴 것이다.
 
국내 은행들의 생존 법칙에는 지역적 확장 뿐 아니라 사업영역 확대도 포함돼 있다. 다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장 개척에 대한 기회와 위험 요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 지역별·산업별 포트폴리오 다양화 

금융당국과 금융회사 경영진들의 시각이 보수화되면서 보다 안정적인 해외 진출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반면 리먼과 같은 대형 금융회사에 대한 M&A 논의는 사실상 사라졌다. 대신 금융산업 정책 측면에서 글로벌 금융위기에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국내 대형 금융회사(메가뱅크)에 대한 검토가 활발해지고 있다. 또 민간 금융회사들은 위기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국내외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는 전략을 우선 검토하고 있다.

실제 한 시중은행의 전략 담당 부행장은 "금융위기 이후 한켠에서는 동종 산업간 M&A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전략이, 다른 한켠에서는 국내와 해외사업, 은행, 증권, 신용카드, 보험 등 금융 산업간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한 전략이 강조되고 있다"며 "이를 위한 국내외 금융권 M&A가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시중은행 자산에서 해외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기준 3.4%에 불과했다. 시중은행들은 외환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2001년부터 해외 진출을 타진해왔지만 지난 8년간 해외 자산 비중은 2~4% 수준을 넘지 못했다. 반면 세계 선두권 은행들은 상대적으로 해외 사업 비중이 높고 지역적으로도 분산이 돼 있다. ★아래표 참조
 


국내적으로 볼 때 은행 수익력의 핵심지표인 순이자마진(NIM)은 2006년부터 하락세를 지속, 2008년 하반기 금융위기 이후엔 1%선까지 떨어졌다. 대출이자 수입이 1000원이라면 예금 이자를 제하고 남는 이자 수입이 10원대에 불과하다는 것. 특히 금융위기와 같은 외부 충격이 국내로 전이될 경우 금융회사의 수익창출 능력이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는 현상에 대해 걱정이 앞선다.
 
LG카드를 인수해 비은행 사업 역량을 키운 신한은행을 제외하면 국내 금융지주회사들의 은행 사업 의존도는 80~90%에 육박한다. 
 

 
◇ 민영화 앞둔 산업은행, 사업영역 다각화 가장 적극적 

민영화 절차에 착수한 산업은행은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는데 가장 적극적이다. 산업은행은 작년말 금호그룹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시장에 매물로 나온 금호생명을 인수, 보험업 진출에 성공했다.

윤만호 산은금융지주 부사장은 "금호생명 인수로 산업은행은 투자은행(IB), 자산운용사, 보험사 등 3종류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됐다"며 "수신 기반을 갖춘 상업은행과 카드업에 진출, 5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은행이 다른 시중은행과 합병할 경우 수신 기반을 획기적으로 넓히고 신용카드업 라이선스(면허)를 확보할 수 있다. 산업은행이 국내에서 최우선적으로 시중은행 인수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다.

산업은행은 당초 해외에서도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은행 2~3곳과 중앙아시아의 교두보로 우즈베키스탄 은행 1곳을 인수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1조원대 매물이었던 태국 7위권 상업은행 시암시티는 입찰 직전까지 고민하다 "차후 발생할 우발채무를 책임져야 한다"는 인수 조건 때문에 포기했다. 현지 상업은행 인수는 동남아시아 IB 업무를 확대하기 위한 주춧돌이라는 게 산업은행측 설명이다.

민유성 회장은 "시암시티와 같은 동남아 상업은행을 인수할 경우 사회간접자본과 에너지 개발 등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필요한 자금을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고 사업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게 돼 국내기업의 해외프로젝트를 지원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미국 데이터자문업체인 딜로직(Dealogic)에 따르면 2009년 기준 전세계 PF 사업 규모는 2925억달러에 이른다. 이중 아시아 지역 비중이 전체의 35.7%로 가장 높다. 

◇ 시중은행 신시장·틈새 시장 공략

하나금융지주도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기 위해 국내외 M&A 시장을 노크하고 있다. 최근엔 다올부동산신탁을 인수, 부동산신탁업 라이선스를 획득했으며 금호생명과 녹십자생명 등 시중에 나온 보험회사 인수도 내부적으로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통신산업과 신용카드산업의 융합과 같은 새로운 시장 개척에 관심을 두고 있다. 국내 최대 이동통신업체인 SK텔레콤과 합작으로 신용카드사업을 새롭게 시작한 배경은 여기에 있다.  

이현주 하나금융 부사장은 "통신과 신용카드 업종은 현 시점에서는 모두 레드오션이지만 두 영역이 융합될 경우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며 "앞으로 3년 후 시장이 어떤식으로 바뀔 지는 모르지만 신시장이 열릴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한다"고 말했다. 

국내 시중은행 중 사업 포트폴리오가 가장 잘 짜여있다고 평가받는 신한금융그룹은 해외 틈새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9월 개점한 신한은행 일본 현지법인 신한저팬(SBJ)은 일본의 저금리 예금을 유치해 역외 고금리 사업에 투자한다는 발상을 현실화시킨 사례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은행 지점들이 본국의 저금리로 조달한 달러자금을 국채에 투자해 안정적인 수익을 거두는 구조와 유사하다.

도쿄와 오사카, 후쿠오카 3개 도시에서 영업을 시작한 SBJ은행은 이후 우에혼마치·우에노·요코하마 지점을 잇따라 개설했다. 박중헌 SBJ 부사장은 "전 일본에 걸쳐 네트워크를 가진 전국은행이 목표"라고 말했다. 

◇ 우리금융 민영화 M&A 촉매제 가능성

연이은 회장 퇴진으로 경영공백 사태를 맞고 있는 KB금융지주도 사업영역 다각화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상반기 중 새로운 KB금융 회장이 취임, 경영공백 사태가 일단락될 경우 다시 증권사나 보험사 인수에 적극 나설 가능성이 높다. KB금융은 이미 카자흐스탄내 5위권 은행인 BCC 은행을 인수, 중앙아시아 금융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해외 진출에 있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재확인시켜 준 계기가 됐다. 국내 금융회사들은 금융이 선진화되지 않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중국,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을 공략하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우치구 국민은행 해외사업 부장은 "외환위기 이후 축적한 리스크 관리와 IT 시스템을 기반으로 상대적으로 자신있는 해외 소매금융 시장을 개척한 후 이를 기반으로 IB(투자은행)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 안정적인 전략"이라며 "큰 밑그림 아래 단기적 성과에 좌우되지 않고 차근차근 해외로 진출해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특히 올해 금융권 최대 화두인 우리금융지주 민영화가 추진될 경우 국내 금융회사들의 국내외 금융회사 M&A 사례는 크게 늘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선두권에서 뒤처질 것을 우려한 시중은행들이 해외 금융회사나 국내 다른 금융업권 매물을 인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외환위기 이후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합병하면서 대형 은행이 나타나자, 신한 하나 우리금융그룹이 금융권 매물들을 인수·합병하면서 현재와 같은 2~4위권 선두그룹을 형성했다.

일본 역시 1990년대말 도쿄은행(외환전문)과 미쓰비시은행(대기업전문)이 일본내 1위 금융그룹인 도쿄미쓰비시UFJ그룹으로 탄생하면서 경쟁사들의 M&A를 자극, 향후 10년간 14∼15개에 달하던 일본 은행권이 3개의 메가뱅크로 재편됐으며 이 과정에서 증권이나 투신사도 모두 은행계 지주회사로 편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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