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문센의 남극탐험대가 눈과 얼음에 맞설 수 있도록 새롭게 개발한 소재인 면 개버딘으로 코트와 텐트를 제공했던 토마스 버버리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같은 소재로 영국 병사들을 위한 외투를 제작했다. 이것이 바로 트렌치코트의 시초.
튼튼한 내구성과 방수 기능을 갖춘 면 개버딘으로 만들어진 영국군의 트렌치코트는 높은 칼라에 래글런 슬리이브의 더블 브레스티드 스타일로 같은 천의 벨트를 D 형태의 링으로 고정하고 윗가슴에 플랩과 견장을 더한 디자인이었다.
군복에서 출발한 만큼 강인한 이미지가 배어 있는 트렌치코트는 전쟁 후에도 스파이나 갱스터, 수퍼히어로들로부터 선택 받으며 코트 자락을 멋지게 휘날렸다.
이후 트렌치코트는 변함없는 사랑속에 크고 작은 변화를 겪으며 딱딱한 느낌의 초기 테일러드 스타일에서 벗어나 점차 대중적인 아우터로 정착한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벨트로 강조한 가는 허리와 그 아래로 넓게 퍼지는 실루엣으로 변모했고, 60년대에는 미니 열풍을 만나 짧은 길이의 경쾌한 디자인으로 탈바꿈한다. 컬러도 기본 베이지, 카키를 벗어나 다채로워졌고, 미래적인 느낌의 에나멜과 비닐 소재의 트렌치코트까지 등장했다.
얇은 포플린이나 실크로 가벼우면서도 부드럽게 연출된 트렌치코트들은 캐주얼한 느낌은 물론 여성스럽고 드레시한 분위기까지 더해주는데, 화려한 오뜨 꾸뛰르의 무대 위에서 이브닝웨어와도 조화를 이루면서<사진2, 2005 봄 크리스찬 라크르와> 레드카펫 위에 서는 자격까지 갖추게 됐다.
올 가을에도 패션리더들의 관심을 모을 만한 개성적인 트렌치코트들이 선보였다.
50년대 모드를 재해석한 디자이너들은 둥근 라인과 풍성한 볼륨 실루엣으로 드라마틱한 디자인을 내놨고, 아쿠아스큐텀의 경우 오래된 브랜드 이미지를 벗기 위해 트렌치코트를 부분적으로 재구성한 미래적인 룩을 선보여 시선을 끌었다.
강하고 독립적인 파워 우먼의 컨셉에 맞춰 실용적인 나일론이나 가죽, 무톤 소재로 제안한 유틸리티 스타일도 눈길을 끌었다. 롱코트에서 점퍼 길이까지 다양하게 전개된 박스형의 트렌치코트는 여러 아이템을 겹쳐 입은 위에 착용되면서 레이어드 트렌드와도 잘 어울렸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도록 도와줄 트렌치코트. 이번 시즌을 함께 할 마땅한 트렌치코트가 없다면 가을이 가기 전에 골라보는 건 어떨까. 혹시 겨울이 너무 일찍 찾아오더라도 걱정말자. 내년 봄 다시 활약해 줄테니.
-김서나 비바트렌드(www.vivatrend.co.kr) 기획팀장 및 패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