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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오전 현대차와 기아는 각각 동일한 내용의 공시를 통해 “애플과 자율주행차량 개발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외신은 협상 중단의 배경을 애플 특유의 ‘비밀유지 원칙’에서 찾고 있다. 애플은 공급자나 잠재적 파트너들에게 협상 관련 비밀유지를 강하게 요구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제품, 서비스의 세부 내용을 유출하는 것은 물론 협력 계약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거액의 위약금을 물리거나 계약을 즉각 파기해왔기 때문이다.
반면 계약 조건을 놓고 양측간 합의에 이루지 못했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과거 국내 통신사와 애플 간 협상 과정을 보면 이번 현대차와 애플의 협상 결렬 배경을 엿볼수 있다.
◇통신사에 ‘초갑(超甲)’이었던 애플
애플과 통신사 간 ‘갑질 계약’은 2009년에 시작됐다. 당시에 국내엔 생소했던 스마트폰 ‘아이폰3GS’가 출시됐고, 이동통신사 ‘만년 2위’인 KT는 반전을 노리기 위해 애플과 아이폰 독점 계약을 체결한다. 애플은 KT에 독점계약을 체결하는 대신 KT에 자사의 요구를 대부분 관철시켰다.
광고비, 수리비 떠넘기기가 대표적이다. 애플은 이동통신사가 아이폰 광고 비용과 보증수리 비용을 대부분 부담하도록 계약을 맺었다. 아이폰 광고를 보면 통신3사와 상관없이 똑같다. 애플이 광고를 만들고 통신사는 광고 마지막에 잠깐 로고를 비출 뿐이다. 그럼에도 광고비용은 그간 통신사들이 대부분 부담했다. 여기에 통신사가 보유한 특허권에 대해서도 애플은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
굴욕적인 계약이었지만 통신사들은 차례로 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KT가 아이폰 인기에 힘입어 빠르게 점유율을 키우자 LG유플러스, SK텔레콤도 어쩔 수 없이 아이폰을 도입하기로 한다. 통신사 한 관계자는 “애초 굴욕적인 계약 조건이라 아이폰을 들여오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이폰을 수입한 KT의 점유율이 빠르게 커지자 어쩔 수 없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돌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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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와 애플의 계약도 양측과 치열한 기싸움이 펼쳐졌을 것으로 보인다. 완성차 입장에서는 애플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면 기존 내연기관차 회사 이미지를 벗고 미래차 회사로 주목받을 수 있다.
애플과 협상중이라는 소식만으로 현대·기아차뿐만 아니라 일본 미쯔다, 스바루, 닛산자동차, 혼다, 도요타자동차 등의 주가가 급등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만 차이가 있다. 아이폰은 스마트폰 시대를 연 선구자였고, 이미 시장에서 제품 성능을 인정받았다. 반면 애플의 자율주행차는 아직 실체가 없다. 단지 아이폰처럼 자동차에서도 혁신의 아이콘이 될 것이란 기대 뿐이다.
반면 미래차 상황은 다르다. 당장 전기차만 해도 ‘테슬라’가 압도적 1위다. 현대·기아차 역시 전기차 분야에서는 세계 톱5에 들어간다. 현대차가 전기차 전용으로 만든 플랫폼(G-EMP)도 곧 출시 예정이다. 차세대 전기차인 ‘아이오닉5’는 현대차의 모든 기술력을 집대성했다. 현대·기아차가 마냥 애플 자율주행차의 하청업체를 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고거 일방적으로 ‘갑’의 위치에서 계약을 체결했던 애플이 예전과 다른 상황에서 본인이 원했던 계약 조건을 관철하지 못하자 협상을 중단했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공정위 ‘감시’도 애플 제약
여기에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애플의 통신사에 대한 갑질 혐의에 대해 동의의결(자진 시정안)을 승인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동의의결은 공정위가 법 위반 혐의가 있지만 위법성을 따져 과징금을 물리는 대신 기업 스스로 시정 방안을 제시·이행해 사건을 신속 종결하는 제도를 말한다. 공정위가 과징금을 부과하면 전액 국고로 귀속되지만, 기업이 자신시정안을 내면 소비자나 거래상대방을 직접적으로 구제하는 장점이 있다.
공정위가 애플의 혐의는 명확하게 ‘갑질’이라고 판단을 내리진 않았지만, 동의의결을 통해 애플은 상당수 계약을 개선하기로 합의 했다.
애플 제품을 광고하기 위해 이통사와 조성한 광고기금을 협의하고 집행하는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기로 했다. 보증 수리비를 이통사가 부담하도록 한 내용은 삭제됐다. 예전에 문제됐던 ‘갑질’ 문제는 상당수 사라진 셈이다.
공정위는 애플의 동의의결 이행여부에 대해 3년간 감시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애플이 우월적 지위를 앞세워 현대차·기아에 마냥 ‘갑질 계약’ 요구를 하긴 어려운 상황인 셈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애플과 현대차간 협상에서 누가 우위인지를 따져봐야하긴 한다”면서도 “한국에서 예전 통신사와 계약방식을 고수하기 어려운 것은 맞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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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양사간 이해관계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느냐에 따라 향후 애플-현대차 협상이 달라질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애플이 자율주행차 파트너로 현대차와 같은 기업을 찾기 어렵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E-GMP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고, 미국 공장도 있어 당장 생산에 나설 수 있는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애플이 다른 완성차업체와 협상을 나서는 과정에서 언제든 현대차와 다시 협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현대차 역시 애플의 소프트웨어 파워에 나름 기대감이 있다. 아직은 하드웨어에서 강점만 있는 현대차가 이번 계약을 통해 애플의 소프트웨어 기술 공유를 계속 원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결국 애플이 평평한 운동장에서 협상을 나설지, 아니면 자사에 유리한 운동장을 다시 설계한 뒤 협상에 나설지에 달려 있을 것 같다”면서 “현대·기아차의 기술력도 만만치 않은 터라 양측이 협력관계 구축이라는 공감대를 만들지가 관건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