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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킹맘]'밤늦게 퇴근했는데 오전회의'…야근만 늘린 유연근무제

김소연 기자I 2018.04.20 06:30:00

일·가정양립 위해 제도 쏟아져도 현장선 체감 못해
유연근무제 활용 전체 근로자 5.2% 그쳐..102.9만명
유연근무제 확산 기업 문화·세부 기준 등 개선 필요
"공공기관·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 해소 노력해야"

일러스트=심재원(그림에다) 작가
[이데일리 김소연 기자] 공공기관과 대기업·금융권을 중심으로 일가정 양립을 목표로 한 근무시간 단축·유연근무제가 잇따라 도입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도만 있고 시행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제도·법 개선과 함께 기업 내부 분위기 조성이 필수라고 입을 모은다. 공공기관·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 노동자·자영업자·비정규직 노동자 등을 위한 대책도 종합적으로 논의돼야 유연근무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12월 26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에서 임서정 고용정책실장(가운데)이 관계부처 합동으로 여성 일자리대책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유연근무제 임금근로자 5%만…활용 지지부진

지난해 12월 정부는 경력 단절 여성을 줄이고 임신기 여성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육아휴직급여 인상·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유연근무 활성화 등을 골자로 한 여성 일자리 대책을 발표했다.

대책에는 1년 이내 육아휴직을 하고, 남은 기간의 두 배를 근로시간 단축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지원’부터 급여 지원 수준을 현 60%에서 80%로 확대하는 방안 등을 포함했다. 현재 임신 12주 이내·36주 이후만 임금 감소 없이 1일 2시간 단축 근무를 허용했으나 이를 임신 전 기간으로 확대하는 임신 노동자 지원, 유연근무제 활성화 등 여성 일자리 대책도 함께 내놨다. 고용노동부는 현재 근로기준법·남녀고용평등법 개정 정부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정부가 일·가정양립을 위한 제도를 쏟아내는 데 비해 실제 유연근무제 확대는 지지부진하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8월 기준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부가조사를 보면 임금근로자 전체(1988만 3000명) 중 단 5.2%인 102만 9000명만 유연근무제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 8월과 비교하면 1년 사이에 20만 6000명이 늘어나는 데 그쳤다.

유연근무제 활용형태 중에서도 재택·원격근무제 비중은 현저히 낮았다. 근로시간 단축근무제를 선택한 비율은 9.8%였고, 재택·원격근무제 역시 5.8%에 불과했다. 그 외 △시차출퇴근제(38.2%) △선택적 근무시간제(31.8%) △탄력적 근무제(26.2%) 등이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 “시차출근제로 오후 9시 퇴근했더니 오전 회의”

KEB하나은행 직원 이모씨(37)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자녀를 둬 행내 시행 중인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 10시 출근제’ 대상이다. 그는 회사 전산시스템에 10시 출근을 신청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씨의 실제 출근시간은 오전 7시30분이다. 이씨가 일하는 지점은 일손 부족에 허덕이고 있어 10시 출근은 꿈도 못 꾼다. 이씨는 “손이 바쁘지 않은 지점은 가능할지 몰라도 바쁜 지점이나 맡은 업무에 따라 오전 10시 출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시스템엔 10시에 출근하는 것으로 잡히겠만 그야말로 ‘허수’”라고 말했다.

올해 KEB하나은행은 초등학교 입학 자녀가 있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이달 말까지 한시적으로 출근시간을 1시간 늦춰 10시에 출근하도록 했다. 퇴근시간은 기존과 동일하게 유지되고, 임금도 같다.

그러나 자녀돌봄 출근제를 신청했더라도 이씨 사례와 같이 동료들이 돕지 않으면 10시 출근은 불가능하다.

KEB하나은행 노동조합 관계자는 “약 500명이 올해 초등학교 입학 자녀를 둔 대상자다. 이중 약 200명이 신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자녀돌봄 출근제 신청엔 잡히지만 실제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 지점에 10시 출근 대상자가 여러 명이 겹치면 시행하기 어려워 인사발령을 내고 대상 직원을 분산시키는 등 제도 보완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은행권을 중심으로 도입해 시행 중인 시차출근제·2교대 근무제 등 유연근무제도 정착까지는 갈 길이 멀다. 퇴근시간이 됐다고 업무를 바로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어 오히려 초과 근무가 발생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업무상 필요한 회의가 오전 일찍 잡혀 시차출근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는 사례도 있다.

KB국민은행 노조 관계자는 “낮 12시에 출근해 밤 9시까지 일하고 퇴근한 직원이 오전 10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아침 출근하는 경우도 있다”며 “유연근무제가 오히려 초과근무를 조장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다만 제도 안착까지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KEB하나은행 관계자는 “실제 이 제도를 이용 중인 직원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라며 “직원들이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공유하면서 독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제도 정착을 위해 기업 내부에서 업무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지만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유연근무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업무 공백을 줄이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며 “언젠간 나도 도움을 받을 것이란 내부 분위기를 조성하고, 업무방식을 개선하고 조직 문화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근본적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 등을 해소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저출산에 대한 문제를 일·가정 양립으로 해결하려면 현재의 사회보험중심·정규직 중심의 기존 제도 개선과 함께 중소기업 노동자·자영업자 등 일하는 노동자 전체를 위한 정책적 대안도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일·가정 양립이 대부분 좋은 일자리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있다”며 “노동시장 제반 구조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관련 법안 통과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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