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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와 사냥터를 떼어내다…'통근길'

오현주 기자I 2016.10.26 06:07:30

일터와 집 분리한 산업혁명
철도개발 맞물려 '통근' 탄생
IT 발달로 재택근무 가능하나
인간 '사회접촉 욕구' 강해
쉽게 사라지지 않을거라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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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의 역사
이언 게이틀리|442쪽|책세상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사무실과 사생활은 별개야. 사무실에 갈 때는 성(城)을 두고 가고, 성으로 올 때는 사무실을 두고 오니까.”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861)에 등장하는 변호사 사무장 존 웨믹의 말은 현실이 됐다. 일터와 쉼터에서 엇박자를 내는 기준 탓에 인류 최초로 직업딜레마에 빠진 분열증 문제를 잠시 덮어둔다면 말이다.

한때는 운 좋은 소수에게만 가능했던 일. 19세기에 집과 일터를 분리한다는 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일터로 나선다는 건 화장실조차 못 갖춘 온갖 더러움과 위험한 공간에서 떠날 수 있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20세기 통근은 이동의 자유와 경제적 진보의 척도가 됐다. 1830년대 시작한 철도문화에 가속이 붙어 전차·버스·지하철 등 대중교통이 일꾼을 실어나른 건 물론 승용차·자전거란 개인적 운송수단까지 움직일 수 있었으니.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통근자라면 누구나 서로를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것도 아주 부담스러운 초근접 상태에서.

영국에선 열차 통근자 1인당 가로세로 0.45m씩이 주어진단다. 솔직히 이 공간은 가축의 인도적 운송을 위한 최소한도보다도 좁다. 하지만 이것도 감지덕지다. 일본이나 인도의 통근자와 비교하면. 적어도 아침마다 ‘승객을 우겨넣는’ 진풍경은 없지 않았나.

객차에 ‘승객 우겨넣기’가 한국의 전유물은 아니었나 보다. 덕분에 국경을 초월하는 신종직업도 생겼는데 ‘푸시맨’이다. 한국 상황이야 상상이 되니 일본의 그림을 감상하자. 일본에선 이들을 ‘오시야’라고 불렀다. 1960년대 이후 열차운영업체가 전격 고용한 이들은 오로지 통근자를 객차에 밀어 넣는 일만 했다. 여기에도 힘과 섬세함 같은 기술적 정교함이 필요했다. 먼저 승객 한 무더기를 젖 먹던 힘을 다해 밀어 댈 것. 그다음 승객과 분리돼 따로 노는 핸드백·가방, 스카프 등을 빠르고 정확하게 빠짐없이 구겨 넣을 것.

오시야에겐 출입문 하나씩을 할당했는데 출발에 임박하면 협동심을 발휘하기도 했단다. 이미 닫힌 문 앞의 오시야가 다음 칸으로 달려가 푸시를 완수하도록 도와준다. 열차가 출발하면 기관사에 경례를 하고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아내면 끝. 오시야의 빛나는 역할로 일본 도쿄지하철은 러시아워 때 통상 수용역량의 200%를 달성할 수 있었단다.

그런데 말이다. 돼지에게조차 부적절하다는 공간에 사람을, 아니 나를 쑤셔 박는 상황을 정말 인내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 참아야 한다. 왜? 지금은 통근시간이니까.

▲아궁이와 사냥터를 분리하려는 열망

영국 출신 문화·문명저술가인 저자가 ‘출퇴근’에 주목했다. 인류의 삶과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현대의 일상이 됐으나 지금껏 조명한 적이 없는 출퇴근. 고작 일터를 오가는 일이 뭐 그리 거창하냐고. 아니다. 거창한 거 맞다. 산업혁명, 또 철도의 발달로 일터와 쉼터가 분리되며 ‘통근’이 생겼다. 도시 주변에는 ‘교외’란 개념이 생겼고, 연이어 자가용·지하철·자전거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탄생했다. 최소한 열차의 충돌사고는 피해야겠기에, 또 지각을 하지 않으려 정확한 ‘시계’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고, ‘점심식사’란 콘셉트가 인생에 훅 꽂혔다. 일대 변혁이 아닌가.

책은 매일 아침 5억만명의 직장인이 일하러 집을 나간 뒤 되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19세기 영국 대도시 시민이 ‘아궁이’(집)와 ‘사냥터’(일터)를 분리하려는 열망이 커지면서부터 이젠 재택근무를 하고 싶다며 처진 몸으로 출근한 오늘 아침까지 생긴 일이다. 아궁이와 사냥터를 떼어놓은 계기는 철도고 재택근무의 꿈이라도 꾸게 한 건 인공지능(AI)이다. 비단 이들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인간은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다. 어째서? 인간의 DNA가 어서 일어나 뭐든 타고 사냥을 나서라며 자꾸 떠미니까. 아주 ‘규칙적인 방랑벽’인 셈이다.

▲‘노상분노’가 출근길을 방해해도

시작이야 찬란했더라도 출퇴근길이 꽃길이 아닌 건 분명하다. 지하철만 힘든 게 아니다. 자동차 출퇴근도 만만치 않다. 저자가 눈여겨본 것은 자동차 통근자가 운전대만 잡으면 확 달라지는 만국공통의 현상. 특별히 ‘노상분노’라고 칭했다. 그냥 분노지수만 높인 게 아니다. 미국자동차협회가 1990년부터 1996년 사이 발생한 노상분노 사례 1만건을 살폈더니 218건의 살인이, 1만 2610건의 부상이 발생했단다. 하다못해 배우 잭니컬슨은 운전 중 메르세데스 차량 앞유리를 골프채로 때려 부수는 볼거리를 제공했다는데. 상대 운전자가 자신의 차 앞에 끼어들었다는 이유에서다.

해결책은 딱히 없어 보인다. 평소 스트레스를 낮추라는 게 전부다. 어느 심리학자는 이렇게도 조언했단다. 격분한 운전자에게 “달라이라마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자문해보라고. 하지만 노상분노는 달라이라마가 머무는 다람살라에서도 빈번하다고 하니.

▲AI가 출퇴근을 없앨까

책은 우주여행처럼 먼 미래로 여겨지던 통근이 일상이 되기까지를 일사천리로 엮어낸다. 그렇다면 다시 먼 미래에 펼쳐질 통근길 풍경은? 과연 인공지능을 대신 회사로 보내고 고통스러운 출퇴근을 끝장낼 수 있을 건가. 그런데 저자의 접근방식은 좀 다르다. ‘굳이 출퇴근을 없애야겠는가’다. 이미 IT 기업에서 도입한 재택근무사례에 비추면 ‘출퇴근의 끝장’은 가능할 거라고 한다. 하지만 출퇴근이 사라지는 건 별개의 문제란다. 인간에게 고도로 발달한 감각적·사회적 접촉욕구 때문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생각해보는 데는 마법 같은 요소가 있다”는 구글의 패트릭 피체트 최고재무책임자의 말을 인용했다. 인간의 DNA를 통째 바꾸지 않는 이상 ‘규칙적 방랑벽’도 없어지지 않을 거고.

출퇴근시간을 ‘내다버린 시간’ 정도로 여겼다면 곱씹어볼 구석이 적잖다. 출퇴근에 바치는 저자의 찬사가 뒷머리를 당긴다. “집에 불을 피울 땔감을 구해오는 여정에 쓰는 시간을 낭비나 헛수고라고 하겠는가”라는. 그러니 그저 개탄할 일만은 아니란 소리다. 켜켜이 쌓아두니 이처럼 역사가 되지 않더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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