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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일반 대중에겐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8년차 뮤지컬배우가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예기치 않은 계기였다. ‘대학로 소극장 창작뮤지컬을 대중에 소개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에서 TV에 출연한 것이 운명을 바꾼 셈이다.
뮤지컬배우 고훈정(34)은 지난 11월부터 방송을 탔던 JTBC 음악 경연프로그램 ‘팬텀싱어’에 출연해 대중의 폭발적 반응을 끌어냈다. 뮤지컬계에선 실력을 인정받은 베테랑 연기자지만 제작진 누구도 이 정도의 인기를 누릴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지난 27일 마지막 생방송 결승전에서 고훈정이 멤버로 있는 ‘포르테 디 콰트로’ 팀(고훈정·김현수·손태진·이벼리)이 최종 우승을 차지하며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결승전을 사흘여 앞두고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난 고훈정은 “처음에는 좋은 소극장 공연과 이런 배우가 있다고 소개하자는 마음이 컸다”면서 “가요·팝·록 등 다방면의 음악을 좋아하는 음악인으로서 잘해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희망도 있었다”고 소회를 전했다.
예상결과를 묻는 질문에는 “전혀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왕 달려온 거 우승하면 좋겠지만 욕심을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다른 출연자인 백인태·유슬기·이동신·고은성·백형훈 등 모두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들이다. 다만 아쉬움, 모자람 없는 무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좋은 음악 하나만 보고 달려왔던 것 같다. 부담은 덜고 축제란 생각으로 즐길 테다.” 결과는 ‘최종 우승’. 하지만 축하 피날레는 잠시. 고훈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연습실로 직행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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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첫 예심을 치른 뒤 6개월 여. 고훈정은 반년을 ‘팬텀싱어’와 함께 보냈다. ‘팬텀싱어’는 국내 첫 크로스오버 남성 4중창 그룹을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지난해 11월 11일 시청률 1.7%(닐슨코리아 집계)로 출발, 온갖 화제를 뿌리며 지난 27일 시청률 3.9%로 종영했다.
많이 바빴다. 고훈정은 곧 개막 예정인 창작뮤지컬 ‘더 데빌’(2월 14일~4월 30일 드림아트센터 1관)과 ‘비스티’(2월 24일~5월 7일 DCF대명문화공장 1관) 두 작품의 병행 연습은 물론 지난달 20일부터 공연 중인 ‘어쩌면 해피엔딩’(3월 5일까지 DCF대명문화공장 2관)에도 멀티역으로 출연 중이다. ‘더 데빌’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역작 ‘파우스트’를 오마주한 창작 록 뮤지컬로 엑스 화이트 역을 맡았다.
“바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힘든 줄 몰랐다. 재미있게 달려왔다.‘어쩌면 해피엔딩’의 분량이 많지 않은 덕에 4편의 겹치기 스케줄이 불가능하진 않더라. 잠을 평소보다 덜 자면 다 된다. 하하하.”
인기를 실감하느냐고 묻자 “연습장·공연장·방송국만 돌다 보니 피부로는 와닿지 않는다”면서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랐을 때는 신기하고 감사하더라. 주변 동료나 지인에게도 응원한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고 고마워했다.
‘팬텀싱어’로 화제의 중심에 서면서 작품 선택 폭도 넓어졌다. 하지만 하고 싶었던 역할이라고 해서 섣불리 도전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역할이라도 감당할 만한 배역이 아니라면 좀더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깜냥이 되느냐의 문제다. 차근차근 배워 나가며 당장 잘할 수 있는 배역에 도전할 생각이다.”
지난 27일 결승전에 함께 오른 뮤지컬배우는 고훈정을 포함해 고은성·백형훈 등 총 3명. 뮤지컬배우 대표로 남아 책임감이 크다고 했다. 그는 “노래를 더 잘하는 선·후배도 많고, 앞으로 공연을 같이할 친구도 있는데 먹칠하지만 말자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면서 “아무 탈 없이 뮤지컬을 조금이라도 알릴 수 있어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실제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 출연 중인 고훈정 배우의 회차는 거의 매진. 여파가 2월에 출연 예정인 ‘더 데빌’로도 이어져 다른 배우 회차보다 더 많은 좌석분이 팔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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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는 없다. 연습만이 살길’은 고훈정의 모토이다. “최상은 없지만 최선을 보여준다는 마음으로 방송과 공연에 임한다”는 그는 “팬텀싱어도 계속 모니터링하며 준비했다.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잘하려면 물어보고 조언을 듣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 덕분에 가창력뿐 아니라 따뜻한 배려를 통해 프로듀서로서의 자질도 인정받았다. 무대마다 하모니에 집중하고 팀원 각각의 장점이 잘 살 수 있도록 든든한 리더 역할을 해냈다.
경희대 성악과 출신인 고훈정은 피아노연주도 수준급. 원래는 싱어송라이터가 꿈이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가수를 하고 싶었지만 부모가 원하지 않아 음대에 갔다. 작곡가·제작프로듀싱도 하고 싶더라. 나중엔 음악이면 무조건 좋았다. 지금은 과도기를 거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고 귀띔했다.
창작뮤지컬에 자주 올랐다. 데뷔작은 2009년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 지난해엔 데뷔 7년 만에 창작뮤지컬 ‘더맨인더홀’로 제5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에서 남자신인상을 받는 겹경사도 맞았다. “라이선스뮤지컬 오디션에서 다 떨어지던 시기였다. 그때 기회를 준 게 창작뮤지컬이다. 모든 걸 배우들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하니까 자산이 되더라. 매력에 푹 빠졌다.”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와 ‘헤드윅’. 나중에 좋은 기회가 되면 배우 조승우와 같은 무대에서 연기하는 영광을 누리고 싶다고도 했다. “남자배우라면 꿈꾸는 작품이지만 록을 좋아하는 내게 잘 어울리는 작품을 언제가 꼭 뜨겁게 해보고 싶다.” 2월에 고훈정은 뮤지컬 ‘더 데빌’ ‘비스티’와 함께 ‘1대 팬텀싱어’로서 콘서트무대에도 오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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