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차라리 '계약심사제도' 폐지하라

권소현 기자I 2018.04.09 07:00:00
[최민수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계약심사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계약심사제도란 건설공사나 용역 등의 발주 이전에 예정가격의 오류나 적법성을 심사해 예산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서울시에서 2003년에 처음 도입했으며, 2008년 이후로는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까지 확산되고 있다.

만약 계약심사가 원가 산정 과정의 실수나 오류 등을 검증한다는 본래 취지대로 운용된다면, 감액 사례와 증액 사례는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발주자 측에서 예산을 인위적으로 삭감하는 도구로 계약심사제도를 활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기도 사례를 보면 계약심사를 통해 지난해에 1041억원을 감액한 반면, 증액은 9억원에 불과했다. 강원도에서도 계약심사를 통해 527억원을 감액하였으나, 증액은 20억원 수준에 불과했다. 더구나 각 지자체에서는 계약심사제도를 통해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의 예산을 절감했다는 것을 경쟁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인위적인 예산 절감은 합리적인 것인가?

현재 공사원가는 기획재정부에 등록한 전문기관에서 정부에서 정한 원가 산정 기준에 근거해 산정하고 있다. 즉, 공사비와 자재단가는 정부가 직접 공표한 표준품셈이나 표준시장단가, 법에서 정한 요율, 그리고 정부 공인기관에서 조사·발표하는 시중 거래가격 등에 근거해 산정한다. 따라서 정상적으로 산정된 공사원가를 인위적으로 수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만약 수정이 필요하다면, 국가계약법령에서 정한 원가 산정 기준을 위반했거나 법적 요율을 잘못 적용한 경우로 국한해야 한다. 또는 일부 공종이 누락된 경우 계산 착오나 중복 계산된 항목을 들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발주자의 요구나 예산에 맞추어 공사비 단가나 자재구매단가 등을 인위적으로 삭감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 한정된 예산에서 더 많은 공사를 발주하려는 목적으로, 혹은 설계 변경이나 추가 공사를 대비해 예정가격을 삭감하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지자체의 감사처분보고서를 보면 일부 공종에서 원가 절감 요소가 있었으나, 계약심사시 이를 발견하지 못한 경우 담당자에게 페널티 부과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계약심사가 더욱더 예산 삭감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초래한다.

정상적인 원가계산에 의거한 설계가격을 인위적으로 감액해 예정가격을 결정했다면, 이는 민법의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예정가격 결정 과정에서 공사원가에 상관없이 발주자 예산에 맞추었거나, 적자 수주가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정하지 않았다면 ‘청약 유인의 하자’에 해당할 수 있다. 만약 계약심사 과정에서 과거 실행원가나 관급자재 구매단가 등을 적용해 예정가격을 변경했다면, 입찰 과정에서 예정가격 이하의 투찰을 금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본에서도 예정가격의 인위적인 삭감이 문제시된 바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는 2014년에 ‘공공공사의 품질확보 촉진법’을 개정해 발주자에게 예정가격을 적정히 설정해야할 의무를 부여했다. 또, 적정한 적산(積算)에 의거해 산출한 공사원가를 인위적으로 삭감, 예정가격을 결정하는 행위를 위법(違法)으로 규정하고, 이를 근절하도록 각 발주기관에 통지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정부는 예정가격의 삭감에만 치중하고 있는 계약심사제도를 폐지 또는 간소화해야 한다. 특히 수 천개의 세부공종별로 일위대가나 노무량, 자재단가 등을 일일이 심사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불합리하다. 그 보다는 총액 측면에서 예정가격의 적정성을 검토하고, 원가 산정 과정의 명백한 오류나 실수를 바로잡는 역할로 한정해야 한다. 계약심사를 별도 운영하기 보다는 시공 방법이나 사용자재의 적정성 등을 심사하는 설계경제성심사(VE)와 통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발주자는 계약심사를 통해 예산을 절감했다고 홍보하기에 앞서 부실공사의 우려는 없는지, 저가 하도급이나 부실자재가 사용될 우려는 없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것이 계약심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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