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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 前차관보 "고립되는 北, 결국 살아남지 못할 것"

이준기 기자I 2014.06.22 10:54:57

크리스토퍼 힐 전 미국 국무부 차관보 인터뷰

[이데일리 이준기 기자] “중국도 북한에 대한 지지를 줄이고 있다. 전 세계 모두가 북한을 지지하지 않으면 언젠가 고립돼 결국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데일리 주최 제5회 세계전략포럼 참석차 방한한 크리스토퍼 힐(사진) 전 미국 국무부 차관보(미 덴버대 국제대학원장)는 지난 12일 강연을 마친 뒤 이데일리와 인터뷰를 갖고 “북한이 요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며 이렇게 운을 뗐다.

사실 북한은 김정은 체제 이후 남한에 대해 일관된 모습보다는 적대행위와 대화 노력을 병행하는 들쭉날쭉 행보를 보이고 있다. 힐 전 차관보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과거 김일성·김정일보다 더 대화하기 어려운 상대”라며 “후계 승계를 마친 김정은은 핵무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려면 중국이 상당 부분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힐 전 차관보는 “(부패 척결 등 내부 문제에 집중하는) 중국이 주도적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면 북한 문제에 어떠한 해법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스토퍼 힐 전 미 국무부 차관보가 1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그랜드하얏트서울에서 열린 ‘제 5회 세계전략포럼(WSF)’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김정욱 기자
그는 남북통일은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이뤄질지 예상하기 어려운 만큼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준비해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통일 비용 문제에 대해서도 “막대한 경제 지원이 있어야 하며 도움을 줄 국가들은 많다”고 단언했다.

주한 미 대사와 미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담당 차관보를 거쳐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와 대북정책 조정관으로도 활동한 힐 전 차관보는 미국 내 최고 동아시아 전문가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인터뷰 내내 보여준 절제된 발언과 상대방의 심중을 읽는 듯한 깊이 있는 눈빛에는 ‘경험많은 직업 외교관’의 모습이 그대로 묻어났다.

◇“한·중·일 관계 개선돼야 북한 긴장할 것”

힐 전 차관보는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급랭한 한·일, 중·일 관계가 조속히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중·일 동북아 3국이 뭉치면 더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북한에 보내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북한을 다루는 전략적 측면에서의 조언인 셈이다.

그는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보다 한·중 정상회담을 먼저 갖는 등 한·중 관계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좋다”며 “한·중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북한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수 있어 북한에는 안 좋은 소식이지만 한국과 미국에는 좋은 소식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발목을 잡고 있는 영토 분쟁과 과거사 왜곡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일각에서는 한·중·일을 얽매는 과거사 문제의 해소를 위해 미국이 더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힐 전 차관보는 그러나 “동북아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은 한결같다”며 “미국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누구의 편에 서지 않고 화합과 평화의 메커니즘을 만드는 데 노력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영토 분쟁은 물론 과거사 왜곡, 북핵 등 동북아를 둘러싼 각종 난관에 접근하려면 ‘투명성’이 전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북아 각국 모두 워낙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만큼 자칫 잘못된 메시지가 전달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혼란 국면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를 보인 것이다.

◇“미·중 국내 문제로 바쁘다..대결 구도 없을 것”

동북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미국이 주도했던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도권 경쟁에 중국이 뛰어든 양상이다. 일부에서는 두 강대국 간 충돌이 동북아 지역에 적지 않은 리스크로 작용할 것이란 지적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

그러나 힐 전 차관보는 “내가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고 단언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및 이라크 사태로 인해 동북아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고, 중국 역시 경제 성장을 유지해야 하고 부정부패 척결 등 정치 개혁에 나서는 등 국내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다만 그는 “매우 탄탄한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미국은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기하겠다는 의지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힐 전 차관보는 러시아와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점에 대해서는 경계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북한을 둘러싼 관련국들이 북한에 대해 각기 다른 이슈를 갖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투명성을 갖고 대화하는 것”이라며 “지금 무엇인가를 결론 내겠다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은 북한과 납치문제 해결 원칙에 합의한 데 이어 러시아도 북한과 경제협력 확대를 위한 잰걸음을 걷고 있다. 이 와중에 한국과 미국은 ‘전략적 인내’라는 구호 속에 군사적 대북압박에만 주력하고 있어 동북아 외교환경 변화에서 주도권을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힐 전 차관보는 “북한은 이미 일본인 납치 문제를 외교에 교묘히 사용해왔다”며 “북한이 실제로 납치 문제 해결을 이행할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남북통일 압력 세졌다..러시아는 ‘독약’ 먹는 것”

힐 전 차관보는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 발언 이후 통일에 대한 압력이 세질 것으로 봤다. 그는 “우리가 예상하는 시기나 방식대로 통일될지는 미지수”라면서도 “통일은 한국인 모두에게 권리이자 의무인 만큼 미국과 세계 다른 국가들은 한국이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막대한 통일 비용 문제에 대해서도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의 정상 회담 발언을 인용해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힐 전 차관보는 “노 전 대통령이 ‘통일에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하자, 부시 전 대통령이 ‘도울 나라가 많다’고 밝혔다”며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동북아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힐 전 차관보는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질문에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러시아는 이 지역에서 경제, 정치적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며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 마디로 러시아가 ‘독약’을 먹은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1000년 넘는 역사를 갖고 있어 내부 문제가 굉장히 복잡하다”며 “미국은 향후 두 나라가 어떤 형식으로 문제를 풀지 지켜본 뒤 스탠스를 결정해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크리스토퍼 힐 전 미 국무부 차관보는 누구

주한 미국 대사와 미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담당 차관보를 거쳐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와 대북정책 조정관으로도 활동하는 등 동북아 문제에 관한 한 미국 내 최고 동아시아 전문가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한국과의 인연은 깊다. 1985년부터 약 4년간 주한 대사관 경제담당 1등 서기관을 지낸 데 이어 부시 1기 행정부인 2004년부터 약 2년간 때 주한 미국대사를 지냈다. 뿐만 아니라 3명의 대통령 아래에서 한국은 물론 마케도니아, 폴란드, 이라크 4개국 대사를 거쳤고 코소보 특사를 맡은 대표적인 외교통이다. 이 과정에서 보스니아와 코소보 등 주요 분쟁지역에서의 평화 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숱한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2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어는 물론 폴란드어, 세르크로아티아어, 마케도니아어, 알바니아어 등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공직을 마감한 뒤 덴버대 조세프 코벨 국제대학원 학장으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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