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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온 편지] 89. 유럽에서 뚱뚱한 나라는

한정선 기자I 2018.10.04 06:00:00
영국 식단 가이드라인(출처=퍼블릭헬스잉그랜드)
[런던=이데일리 이민정 통신원] 영국인들이 오후 늦게 펍에 모여 축구 경기를 관람하거나 저녁을 먹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맥주, 사이다, 위스키 등 알코올음료입니다.

술은 다양한 건강 문제를 유발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비만이죠.

세계보건기구(WHO)가 최근 유럽 53개국 실태를 조사한 결과 말타와 터키 다음으로 영국이 가장 뚱뚱한 유럽 국가에 올랐습니다. 영국 성인의 23.8%가 비만이며, 비만 인구를 포함해 성인 전체의 63.7%가 과체중으로 집계됐습니다. 작년 조사에서는 영국의 비만 정도가 5위였는데 1년 만에 리투아니아와 안도라를 제치고 3위로 올라선 것이죠.

또한 영국은 폴란드와 라트비아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많은 알코올음료를 마시는 국가로 조사됐습니다. 유럽인 1명당 1년 동안의 평균 순수 알코올(물 등을 타지 않은 알코올 원액) 음용량은 8.6리터인데 반해 영국인은 10.7리터로 조사됐습니다.

영국 보건당국은 성인 1명당 권장 알코올 음용 기준으로 일주일에 와인 한 병 반, 또는 맥주 6파인트(약 2.8리터)를 권고하고 있는데 영국 쉐필드대 등의 연구에 따르면 영국 성인 25% 정도가 꾸준하게 권장 기준을 넘겨 술을 마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캔에 1파운드(약 1500원)도 하지 않는 저렴한 맥주, 사이다 등을 슈퍼마켓 등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과음에 노출되는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연구진은 모든 영국인이 과음하지 않고 권장 기준에 따라 술을 마실 경우 술 산업 매출이 약 38%, 130억파운드(약 19조원)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국민이 술 음용 권장 기준에 맞춰 술을 마시도록 알코올 업계의 협력을 이끌어냈을 때 업계의 매출 손실 부분을 보상해 주려면 펍에서 파는 맥주 한잔 가격을 2.64파운드 인상하고, 슈퍼마켓에서 파는 와인 한 명당 가격을 4.36파운드 올려야 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과음 방지를 위해 주류업계가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죠.

WHO 전문가들은 영국의 경우와 관련해 술 음용 습관이 국민 비만에 큰 악영향을 비친다고 경고합니다. 클라우디아 스타인 WHO유럽지부 리서치 디렉터는 “성인의 술 음용은 비만에 크게 기여한다”며 “비만과 알코올은 당뇨와 심장병 등 많은 질병과 연관 관계가 있기 때문에 국민의 비만 정도가 증가하고 술 음용이 증가하는 추세는 수명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습니다.

과음 문제도 그렇지만 비만 문제도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국 슈퍼마켓이나 거리에 값싸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정크푸드가 넘쳐나는 것도 문제지만 특히 넉넉하지 못한 가정은 자금 여유가 없는 것이 건강한 식단을 꾸리지 못하는 요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저소득층 가정은 어떻게 먹어야 건강한지 알고는 있지만 재료 비용 등을 감당하기 어려워 저렴하지만 영양가 낮은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영국 정부의 건강한 식습관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보면 과일과 야채를 하루 5번 먹고, 일주일에 생선은 두 번 섭취하며, 설탕이 덜 들어가고 식이섬유가 풍부한 탄수화물 섭취하도록 권장하고 있는데 설탕 등이 덜 들어가고 덜 정제되고, 신선하고, 영양가가 풍부한 식품들은 상대적으로 비쌉니다.

영국 싱크탱크 ‘푸드파운데이션’은 정부의 식단 가이드라인을 따르려면 성인 2명과 4~8세 아이 2명으로 구성된 4인 가구가 일주일에 112.04파운드를 써야 한다고 추산했습니다. 1년에 약 1만5860파운드 이하로 버는 소득 하위 20%는 정부의 식단 가이드라인을 따르려면 월세 등 주택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외한 소득에서 약 42%를 음식 비용으로 써야 한다고 분석했습니다.

푸드파운데이션은 “소득 하위 가정이 건강하지 않은 식습관을 갖게 된 것은 정보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관심이 부족해서도 아니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며 “나쁜 식습관은 비만, 당뇨 등 식단과 관련된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학교 무상급식 확대 등의 방안으로 저소득층의 건강한 식단 접근성을 높여야한다고 권고했습니다.

영국은 정크푸드 과잉 섭취 등 나쁜 식습관과 지나친 음주 등으로 비대해지는 국민이 늘어나는 것과 비만으로 유발되는 질병 치료 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시청하는 시간대에 정크푸드 관련 광고를 줄이고 제품에 과도하게 설탕을 넣는 식품 제조업체에 설탕 세를 매기는 등 나름의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영국 공중보건국(PHE)과 음주예방단체가 손잡고 주중에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을 늘려가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었죠. 이같은 노력의 효과가 나타날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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