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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 칼럼] 개헌의 ‘시대정신’을 묻는다

허영섭 기자I 2018.03.30 06:00:00
헌법을 만들고 또 일정한 기간이 지나 개헌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국가 환경에서 시대적인 요구를 확인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운용의 기본 철학인 헌법에 국민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반영해 나가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이른바 ‘시대정신’이라는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 ‘수정헌법 2조’를 둘러싸고 논란이 가열되는 미국 사회의 경우가 하나의 사례다. 일반인에게 총기 소지를 허용하는 근거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론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걸핏하면 충동적인 총기사고로 애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판국에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미국이 영국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는 역사적 과정에서의 저항권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선택 방향에 대한 찬반이 엇갈릴 수밖에 없다.

헌법과 관련한 논란은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에서도 비슷하다. 최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에게 종신제 권한을 부여한 개헌 조치를 놓고 표출되는 내부 반발에서도 그런 점을 짐작하게 된다. 역대 최고 득표율로 4선에 성공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개헌을 통해 영구집권 가능성을 엿볼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일본에서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평화헌법의 개정을 밀어붙이는 중이다. 국민들이 원하느냐, 아니냐가 요점이다.

우리 헌법의 개정 논의에서도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개헌 필요성이 진작부터 제기돼 왔으나 과연 어떠한 내용으로 바꾸느냐에 대한 해답이 아직 수렴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헌법이 1987년 개정됐으므로 그동안의 사회 발전상에 비해 뒤떨어져 있다는 점에는 거의 동의가 이뤄진 상황이다. 하지만 그 간격을 채우는 방안에 있어서는 정당·정파 간의 견해 차이가 두드러진다.

여야 정치권의 개헌 협상이 추진되는 가운데 이미 국회에 제출된 정부 개헌안에서도 그 차이점이 드러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의 폐해를 초래한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어떻게 축소·분산할 것이냐 하는 것이 가장 큰 쟁점이지만 노동계 주장에 편향돼 개헌안이 만들어졌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전문에 부마항쟁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항쟁 등 민주화 과정에서의 역사적 사실들이 추가된 데 대해서도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더구나 정부 개헌안은 현행 ‘5년 단임제’인 대통령 임기를 ‘4년 연임제’로 채택하고 있어 오히려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한 측면이 다분하다. 국정의 연속성과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 필요성을 공식 제기하면서 제시한 카드가 바로 ‘4년 연임제’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평가하면서도 시장질서가 흐트러져 기업경영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를 감출 수가 없다.

정권 차원의 지향점을 개헌안에 반영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도 고려 사항이다. 헌법에 집권진영의 정책 방향이 포함되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겠으나 그렇게 된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헌 필요성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국가 기본법을 수시로 바꾼다면 그에 따른 부작용과 혼란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개헌안에는 보수·진보 진영이 함께 수긍할 수 있는 국가발전 이념을 내세워 정권이 바뀌더라도 그 안에서 서로 조화를 모색해 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끄는 게 바람직하다.

지금 우리는 민주화 과도기에 마련된 헌법을 고치려는 과정에 있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성숙한 만큼 그에 맞도록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필요성 때문이다. 국민 각자가 맞는 옷을 고르도록 하고 그 공통 요소를 찾아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민이 요구하는 ‘시대정신’일 것이다. <논설실장>

대통령 개헌안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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