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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제도 스무돌]"빌린 돈 안갚냐" 비판…제도개선 요구도 거세

한광범 기자I 2019.01.03 06:13:00

"돈 안 갚는다"는 부정인식 여전…한계상황 채무자 발생
"빚 책임을 채무자 개인에게만 돌려선 안돼" 전문가 지적
제도적 미비도 여전…지역별 변제기간 다른 혼란도



[이데일리 한광범 송승현 기자] “혹시 사업에 실패한 뒤에 채권자들이 마냥 무서운 존재로만 느껴지고 희망도 없이 계신 분들이 있다면 회생절차에 한번 도전해 보시길 바랍니다.”

피트니스 클럽을 운영하다 30억원대 빚을 진 뒤 법원의 회생절차를 이용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배우 이훈씨는 지난해 6월 취재진과 만나 이 같이 밝혔다.

오는 3월이면 벌써 도입 20년째가 되는 우리나라의 도산법원은 그동안 이씨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던 수많은 사람·기업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며 `사람을 살리는 재판`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도산제도는 지난 1999년 3월 처음으로 도입됐다. 외환위기 후폭풍으로 인해 기업들이 줄도산하던 시기였다. 당시 세계은행(IBRD)은 우리 정부에 20억달러에 이르는 구조조정 차관을 제공하며 도산법원 설치를 선결조건을 내걸었다. 외환위기의 여파가 이어지던 2000년대 초반 신용카드 대란으로 빚더미에 앉는 개인이 급증하자 국회는 개인채무자회생법을 통과시켜 도산법원의 역할을 개인 대상으로 확대하는 등 그 역할을 키우고 있다.

◇“제도 악용해 빌린 돈 안갚는다” 부정적 시선 여전

하지만 도산제도에 대한 우리 사회에서의 부정적 인식은 여전히 상당하다. “제도를 악용해 남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는다”는 비판적인 시선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파산제도를 악용해 재산이 있는데도 빚을 갚지 않으려는 채무자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인식 탓에 현재 도산제도를 신청하지 않고 있는 한계상황의 채무자가 150만명에 달할 것으로 법원은 보고 있다. 기업들 역시 낙인효과를 우려해 도산제도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다. 이에 대해 한 판사는 “모든 것을 의심을 갖고 보면 안 된다”며 “모럴해저드 여지가 있는 사람에 대해선 회생이나 파산을 불허하면 되며 이를 가려내기 위해 수많은 서류를 제출하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채권자로선 빌려준 돈을 뒤늦게라도 받게 돼 좋고 채무자로선 돈을 벌어도 채무 변제로 모두 나가지 않아 근로 의욕이 생기게 된다”며 “사회적 낭비를 막아 국가 전체적으로도 이것이 이득이 되는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채무자에게만 채무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 법조계 인사는 “돈을 빌려준 이에게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빌려줘야 한다`는 것이 도산제도의 정신”이라며 “채무자뿐 아니라 채권자에게도 빚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부족한 생계비·변제기간 제각각…제도개선 주장도

그러나 제도적인 미비점으로 인해 회생제도가 덜 활성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일단 개인회생 변제기간에 가용소득 중 생활비로 공제되는 금액이 너무 적다는 지적이다. 개인회생에 들어가게 되면 3년 동안 매달 채무자의 가용소득 중 생활비 공제 부분을 제외한 모든 금액이 채무변제에 사용된다. 법원은 1인 가구 기준으로는 생활비는 월 100만원, 2인가구 기준으로는 150만원으로 책정하고 있다.

한 변호사는 “소도시나 지역의 경우 저 금액으로 생활이 가능한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서울 등 대도시에선 사실상 생활이 어려운 수준”이라며 “실제 도시별 필요 최소한의 생활비가 어느 정도인지 분석해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법원에선 기본생계비 외에 추가적으로 자녀 교육비나 임대료 등을 추가 생계비로 인정해주고 있지만 일선 판사들도 기본 생계비가 적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다만 생계비 공제액은 법에 명시돼 이를 개선하기 위해선 국회에서의 법 개정이 필요하다.

또 법원 외부에선 모럴해저드를 막기 위한 까다로운 서류 제출 절차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법원은 파산·회생 신청인에게 개인 재산 자료뿐 아니라 배우자, 부모, 형제 등의 재산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가족 등에 대한 부담을 우려해 파산·회생 신청을 주저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법조계 인사들의 전언이다. 이에 대해 법원 관계자는 “실제 신청인 중에선 재산을 배우자 등 가족 명의로 이전해 놓는 경우가 있는데 채권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은닉 재산”이라며 “회생제도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선 가족 재산 조사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반박했다.

한편에선 변제기간이 법 개정을 통해 3년으로 단축됐지만 기존 신청자의 경우 법원에 따라 줄여주는 변제기간이 제각각이라는 문제도 있다. 도산전문법원인 서울회생법원은 법 개정 취지에 맞게 기존 신청자에 대해서도 변제기간을 조정해주고 있지만 다른 법원의 경우는 변제기간 조정을 불허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이에 한 판사는 “결과적으로 지역 차별이 됐다”고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이 영역은 재판 사안으로, 법관의 독립에 대한 부분이라 일률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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