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투자레슨]전지전능한 중앙은행은 없다

이데일리 기자I 2024.06.13 06:15:00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중앙은행의 일거수일투족은 투자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요즘은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최근에는 미국의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FOMC가 유튜브로 생중계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동시통역과 함께 파월 의장의 발언을 생중계로 시청할 수 있다. 한국의 많은 투자자들이 오늘 새벽에도 잠을 설치며 6월 FOMC 결과를 지켜봤을 것이다.

중앙은행은 현대 자본주의의 위대한 발명물이다. 17세기에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중앙은행이 설립되긴 했지만, 요즘과 같은 역할을 하는 현대적 중앙은행의 기원은 1913년에 설립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로 봐야할 것이다. 중앙은행의 설립 전후로 자본주의는 크게 달라졌다. 중앙은행은 국가 경제에 두루 통용되는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데, 중앙은행과 무관하게 시장에서 금리가 결정되는 메커니즘을 살펴보자.

예나 지금이나 시장에서 결정되는 금리는 두 가지 원리에 의해 결정돼 왔다. 일반적인 투자론 교과서에 나오는 ‘(명목)금리=실질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 산식은 금리가 자금의 수요에 따라 결정된다는 논리가 내포돼 있다. 위 등식에 따르면 경제성장률이 높아질 때 금리도 상승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고성장을 하면 기업의 투자 수요와 가계의 소비 수요가 늘어나게 마련이다. 투자와 소비 모두 돈을 필요로 하니, 경제가 고성장을 할 때는 돈의 가치인 금리가 높아지게 된다. 자금 수요의 관점에서 금리를 해석하면 경기가 좋을 때 금리가 상승하는 경향이 있고, 경기가 나쁠 때 금리는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론 돈을 빌려주는 자금의 공급자 입장에서 금리가 결정되기도 한다. 자금 공급자에게 금리는 ‘내 돈을 돌려받지 못할 리스크’에 대한 대가에 다름아니다. 금융기관과의 거래에서 신용도가 낮은 경제주체가 부담해야 할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자금 공급자 관점에서의 금리 결정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이다.

금리는 자금 수요자와 공급자의 입장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결정되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심각한 경제 위기 때는 자금 공급자의 논리가 금리 결정에 큰 영향을 줬던 것 같다. 문헌으로 기록된 금리의 역사는 5000년에 달한다. BC 3000년 바빌로니아 왕조 때부터의 금리 기록이 남아 있는데, 바빌로니아 왕국을 비롯해 그리스 공화정, 로마 제국 등 주요한 정치권력들이 운명을 다하는 국면마다 금리가 크게 치솟았던 기록이 있다. 재정악화를 비롯한 경제력의 쇠퇴가 권력의 몰락을 불러오곤 했기 때문에 기준 질서가 붕괴되는 국면에서는 경기가 좋았다고 볼 수 없다. 자금 수요자 입장에서 보면 경기가 나쁠 때 금리는 떨어지는 것이 정상인데, 왕조 등이 쇠하던 위기 국면에서 오히려 금리가 상승했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여윳돈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자금 대여에 높은 이자(리스크 프리미엄)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등장하기 전에는 경제위기가 닥치면 그 여파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곤 했다. 심각한 위기 국면에서 오히려 금리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설립되면서 이 딜레마가 해결된다. 경기가 악화되면 공적 기관인 중앙은행이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현대 중앙은행은 위기 때 오히려 높은 이자를 요구했던 채권자들의 탐욕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는 위기 때마다 중앙은행이 결정적인 소방수로 등장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2020년 코로나 팬데믹 국면에서도 중앙은행이 풀어낸 천문학적인 유동성이 위기 극복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유동성 공급의 양뿐만 아니라 돈을 푸는 방법도 파격적으로 바뀌었다. 중앙은행은 특정 자산을 민간금융기관들로부터 매입함으로써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데, 통상 중앙은행은 만기가 짧은 국채와 정부 기관의 보증이 있는 모기지 채권을 매수해 왔다. 부도 위험이 없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자산인데다, 만기가 짧아 이자율 변동 위험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은 장기국채를 매입(양적완화)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 이외의 민간이 발행한 본질적으로 위험한 자산을 매수(질적완화)하기도 했다.

일본을 보면 중앙은행의 역할이 한 없이 확대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일본은행(BOJ)은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거의 무제한으로 매수하면서 재정지출 재원을 마련해줬고, 심지어는 주식시장에서 ETF를 매수하기도 했다. 코로나 팬데믹 직후 연준과 유럽중앙은행(ECB)이 행한 파격적 정책들은 이들이 일본이 걸어갔던 길을 따라가는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해줬다.

현대화폐이론(MMT)은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이 행한 여러 실험들을 옹호하는 이론이다. 민간의 수요가 극히 약할 때는 정부라도 지출을 해줘야 하는데, 지출을 위한 재원 마련은 중앙은행이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매수해 줌으로써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MMT를 일컬어 ‘현대적이지도 않고’, ‘화폐통화 이론도 아니고’, ‘이론적 논거도 빈약하다’는 주류 경제학계의 비판도 많지만, 일본과 같은 큰 국가가 사실상 MMT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냉소적으로만 평가할 일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중앙은행이 가진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관제자본주의가 성공적으로 구현돼 왔다. 특히 주식을 비롯한 자산시장이 그 효과를 제대로 누렸다. ‘중앙은행이 우리편’이라면 ‘작은 굴곡은 있을 수 있지만, 결정적인 파국은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투자자들은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나름 가져볼 만한 기대이지만, 인플레이션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다. 일본은행이 보여줬던 파격적인 경제 개입도 인플레이션 압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고, MMT를 주창하는 학자들 마저도 ‘물가 불안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MMT 시행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다.

연준의 공격적인 긴축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물가가 높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의 과도한 재정지출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지출 재원을 마련하고 있는데, 국채 공급 증가는 금리를 상승시키는 요인이다. 위기 때마다 실력을 발휘했던 중앙은행이 언젠가는 국채를 매수해 줌으로써 금리를 안정시킬 것이라는 암묵적 기대를 투자자들은 가지고 있지만, 정부의 지출 증가 자체가 인플레이션을 조장하면서 연준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을 축소시키고 있다. 지난 십수년 간 경험해 온 중앙은행의 전지적 힘이 인플레이션 상황에서도 작동할 수 있을지는 검증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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