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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온 편지] 80. 전쟁도 아닌데…식량 비축 현실로?

한정선 기자I 2018.09.04 06:00:46
식량 비축 일러스트(출처=가디언)
[런던=이데일리 이민정 통신원] 유럽의 중립국 스웨덴은 올해 국민 480만명에게 전쟁 등이 일어날 경우 행동요령 등을 알려주는 20페이지짜리 인쇄물을 일괄적으로 나눠줬습니다. 스웨덴이 자국 국민 전체에 전쟁 대비
요령 등을 담은 책자를 일괄 배포하는 것은 50여 년 만에 처음입니다.

세계 1,2차 대전도 피했으며, 약 200여 년간 전쟁이 없었고, 국제 뉴스에 등장하는 것이 지극히 드물 정도로 조용한 국가로 여겨지는 스웨덴에서 왜 전쟁 대응 요령 등이 담긴 책자를 갑자기 발간했을까요. 전쟁 등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국민의 동요가 예상되는 가운데서 말이죠.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로 러시아가 지목됩니다. 러시아가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하고 러시아 항공기와 잠수함이 스웨덴 영공과 영해를 불법적으로 넘은 일도 발생하면서 스웨덴 내에서는 안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19세기 초 스웨덴의 마지막 전쟁 상대도 러시아였죠. 당시 스웨덴은 러시아에 패해 핀란드를 넘겨 줬습니다. 올해 영국에 살고 있던 러시아 이중스파이 독살 사건의 배후로 러시아 정부가 지목되는 등 유럽에서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한 불안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스웨덴 정부는 이번 책자를 발간하면서 자연재해, 테러, 사이버공격, 전쟁 등을 대비해 미리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책자에는 이 같은 위기 대응 시 가장 필수적인 사항으로 식량 비축에 대한 권고가 등장합니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크래커 등 탄수화물, 건조된 콩 종류, 캔에 든 염장 식품들, 쌀, 에너지 바 등을 예로 들고 있죠.

영국에서도 비슷한 식량 비축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위기 때문이죠. 바로 영국이 새로운 무역협정을 맺지 못하고 유럽연합(EU)을 탈퇴(브렉시트, Brexit)할 경우를 대비해서입니다. 아무런 협정 없이 탈퇴할 경우 영국 내 식품이 부족하게 될까 봐, 또는 파운드 가치 하락과 수입 물가 상승 등으로 식료품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우려에 미리 사두자는 것입니다.

영국은 내년 3월 공식적으로 유럽연합을 탈퇴합니다. 그러나 영국이 EU를 탈퇴한 이후의 유럽연합과의 무역 등 관계 설정에 큰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으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특히 EU와 상호호혜적인 새로운 무역협정을 맺지 못할 경우 지금까지 EU 지역에서 아무런 무역 장벽 없이 저렴하게 공급받던 식품 등을 공급받지 못하면서 영국이 먹거리 혼란을 겪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농민연합(NFU)은 만약 영국이 새로운 무역관계를 설정하지 못하고 EU를 탈퇴하고(No deal Brexit), 영국이 자체 생산으로 국민들의 먹거리를 감당해야 된다면 1년 내 영국 내 식품이 동날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습니다.

영국 환경부 등에 따르면 영국은 영국 국민들에게 필요한 식품 가운데 약 60%를 자체적으로 생산합니다. 30년전 74%였던 것과 비교하면 자급자족력이 감소하고 있는 것이죠.

미네트 바터스 NFU 회장은 “국내 생산을 최대화하는 한편, 유럽연합과 장애 없는 자유무역협정을 맺고 숙련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식량 안보와 농업의 미래에 필수”라고 강조했습니다.

영국이 새로운 무역협정을 맺지 못하고 유럽연합을 탈퇴하거나 이 때문에 영국 내 식품 대란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이 크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식료품을 미리미리 비축해두자는 움직임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디언에 한 독자는 “브렉시트로 혹시라도 위기가 발생하면 가족을 돌봐야 한다”며 “1~2달 치의 파스타 면, 캔에 든 참치, 당근, 감자, 양파, 수프, 과일과 쌀, 물, 오렌지주스 등을 사 놓았다”고 전했습니다. 다른 독자는 “필요하면 정원에 채소들을 키우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도미닉 랍 브렉시트부 장관은 앞서 “만약 ‘노 딜 브렉시트’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식료품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식품 산업과 협력하겠다”고 밝혔지만 국민들의 우려는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영국 식품유통업체들도 EU 지역에서 공급받는 식료품의 공급량을 늘리는 등 대비 태세에 들어갔습니다.

영국 무역 장관을 역임하고 영국 대형 슈퍼마켓 체인 가운데 하나인 웨이트로즈 대표였던 로드 마크 프라이스는 노딜브렉시트 상황이 오더라도 식료품 부족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봤습니다. 그러나 식료품 가격 상승은 예상 가능하다고 말했죠.

그는 “만약 유럽과 새로운 무역협정 없이 국제무역기구(WTO) 규정으로 회귀하게 된다면 모든 농산품에 관세를 매기게 되고, 이 때문에 식료품 가격은 상승할 수 밖에 없다”며 “유럽연합 대신 유럽연합 이외의 지역에서 들여오는 제품의 공급을 늘리는 것도 비용을 발생시켜 식료품 가격을 상승시킬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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