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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 공시 '미스매치'···"재주는 보험사가, 공은 은행이?"

유은실 기자I 2024.01.26 05:30:00

380조원 육박 '퇴직연금 시장' 쟁탈전 심화
'우수상품 제공 실적' 없이 '운용실적'만 공시
"자산관리하는 곳 따로 있어···머니무브 실체 못담아"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이데일리 유은실 기자] 퇴직연금 시장이 300조원대로 훌쩍 크면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국내 금융사들의 경쟁이 심화하고 있다. 그러나 현 금융감독원의 퇴직연금 공시 체계에서는 실제 ‘머니무브’와 ‘상품 제공 실적’을 완전히 담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퇴직연금 사업자별로 ‘적립금 운용금액’ 실적을 매분기 공시하고 있는데, 이는 이 금융사들이 실제 퇴직연금 자산을 맡아 굴리는 수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수상품 제공 실적을 배제한 채, 운용금액만 보여주다 보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공은 왕서방에게 돌아가는’ 구조가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5일 금융감독원의 통합연금포털 퇴직연금 비교공시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 국내 금융사(은행·보험·금융투자)가 보유한 퇴직연금 적립금(DB형·DC형·개인형IRP 합계)은 총 378조원을 돌파했다. 1년 만에 47조5000억원가량 늘었다. 업권별로 보면 은행권 적립금은 198조481억원으로 전년 대비 15.93% 증가했다. 같은 기간 금융투자업계 적립 규모는 17.45% 늘어난 86조7397억원으로 집계됐다. 은행·증권업계가 두자릿수대 성장률을 보이는 동안 보험업권 적립 규모는 2022년 85조8879억원에서 2023년 93조2479억원으로 8%정도 늘었다.

퇴직연금 ‘운용관리’ ‘자산관리’ 나뉘어…공시에는 운용금액만

금융감독원이 운영하는 통합연금포털 공시에 적립금이 많거나 적립금 증가율이 높다면, 실제 이 금융사 상품에 투자한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일까. 금융업계 안팎 관계자들은 ‘실제는 모른다’고 답했다. 퇴직연금 서비스는 일반적으로 ‘운용관리’와 ‘자산관리’로 나뉘는데, 공시에는 적립금 운용금액만 나오기 때문이다.

운용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운용관리기관’엔 은행·보험·증권사가 있다. 이들은 회사에 퇴직연금 계좌를 열어주고, 다양한 상품을 제시해 연금 설계를 돕는다. 운용관리 금융사의 핵심 역할은 자산 직접 관리보단 적립금 ‘레코드 키핑(연금기록 관리)’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자산관리기관은 실제 연금계좌의 설정된 자산을 관리한다. 운용관리기관에 상품을 제공해 실제 돈을 굴려주는 역할을 맡는 셈이다. 여기엔 은행뿐 아니라 증권·보험·자산운용사 등이 포함된다.

이렇게 운용관리기관은 자산관리기관과 일치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예컨대 OO은행에 퇴직연금 계정을 연 A씨가 상품 포트폴리오 중 □□증권사 상품 가입을 요청할 수 있다. 이럴 경우 A씨의 퇴직연금 운용관리기관은 OO은행이지만, 자산운용기관은 □□증권사가 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A씨의 돈이 OO은행 계좌에서 □□증권사로 옮겨가게 된다는 것이다. 고객에서 운용관리기관으로 돈이 한 번 옮겨간 뒤 운용관리기관에서 퇴직연금 상품을 제공한 자산운용기관으로 2차 머니무브가 발생하는데, 현 공시는 1차 머니무브를 통해 발생한 적립금만을 보여준다. 이게 금감원 비교공시에 나오는 ‘적립금 운용금액’이다.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실제 투자 중인 상품 제공실적과는 다른 개념이라, 금감원 공시와 실제 돈이 옮겨간 곳 사이에 ‘미스매치’가 발생한다.

실제 운용금액과 자산관리액이 몇조원 이상 차이 나는 금융사들이 볼멘소리를 내는 이유다. 금융권 관계자는 “퇴직연금 사업자 공시에 나오는 운용관리 적립액과 실제 자산 관리액이 5배가량 차이 나는 금융사들도 있다”며 “현 공시가 고객들이 어떤 금융사에 자산관리를 맡겼는지에 대한 실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설명했다.

‘번들형’ 계약 많았기 때문…“자산관리액도 공시해야”

금융당국과 전문가들은 그동안 퇴직연금이 운용관리기관과 자산관리기관을 통으로 묶어 함께 계약하는 ‘번들형’ 계약이 많았기 때문에 공시에 ‘운용금액’ 기준만 제시해 온 것으로 분석했다. 번들형 계약이 대부분이라 운용액과 자산관리액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강성호 보험연구원 선임위원은 “과거엔 퇴직연금의 운용과 자산관리를 같은 기관에 맡기는 번들형 계약이 많았다”며 “퇴직연금 시장 내 경쟁이 치열해지면, 운용사와 자산관리사가 분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에 금융권에선 투자자들이 우수 성과 상품을 선택할 수 있게 지원하기 위해선 ‘자산관리액’도 함께 공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많은 금융사들이 금감원 공시를 기준으로 퇴직연금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소비자들이 퇴직연금 상품 성과를 오인할 수 있어서다.

금융권 관계자는 “고객들은 보험사, 증권사보다는 계좌 생성 문턱이 낮은 은행에 계좌를 더 많이 만든다. 이렇게 되면 공시상 은행들의 적립금 운용금액이 높을 수밖에 없다”며 “개인형 퇴직연금 시장이 활성화되고 있는 만큼, 소비자 선택에 진정 도움이 되려면 자산관리액도 같이 공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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