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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에서 여야 의원들을 만나 식사를 할 때면 주로 밥값을 내는 쪽이었다. 법안 통과 등 부탁할 일이 많은 ‘을’ 처지였기 때문이다.
요즘은 다르다. 의원들이 서로 본인 밥값은 본인이 내겠다며 나서고 있어서다. 기재부 비서실 관계자는 “과거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등을 하고 부총리와 의원들이 다 같이 식사를 하면 우리(정부)가 식대를 다 냈다”며 “김영란법이 시행된 뒤에는 서로 무조건 더치페이를 하므로 ‘호스트’라는 의미가 사실상 없어진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일반적인 약속에서도 상대편이 식당을 예약하면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장소를 고를 땐 1인당 식대를 무조건 3만원 이하에 맞추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영란법 시행 한 달, 공직사회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고위공직자이더라도 식사 장소로 값비싼 한식당 등을 피하고 식대 각자 내기도 일상의 규칙으로 자리 잡고 있다. 법 위반을 피하려는 ‘몸 사리기’ 영향이지만 한국 사회 특유의 “우리가 남이가” 문화가 개선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으레 주고받던 선물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 9일 경기 수원시 광교 테크노밸리 내 차세대 융합기술연구원에서 열린 간담회 참석 후 연구원 소속 직원이 건넨 종이 가방을 하나 받았다가 비서를 통해 뒤늦게 이를 돌려보내야 했다.
이 가방에는 연구원이 직접 개발한 초콜릿 세 상자가 들어 있었다. 가격은 3만 6000원가량으로 김영란법 가이드라인(선물은 5만원 이하)을 넘지 않았지만 ‘직무 연관성’이 문제였다. 연구원은 간담회에서 이 대표에게 예산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처럼 직접적인 직무 연관성이 있다면 공직자가 커피 한 잔 얻어 마셔도 법 위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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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당 의원 보좌진은 “어디까지가 부정 청탁이고 공익을 위한 것인지 기준이 불분명해 민원 행정이나 예산 편성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만남이 무미건조해졌다는 아쉬움도 나온다. 정책 협의 등을 할 때 식사를 하거나 술잔이 기울이며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순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 고위관계자는 “김영란법 시행 이후 약속이 부담스러워져 낮에 하는 공식 모임 외에 저녁 자리는 전혀 갖지 않고 있다”면서 “한없이 이렇게 갈 수는 없으니 앞으로 식대를 ‘n분의 1’을 하거나 업무추진비를 써서라도 민간·외부와의 소통 기회를 늘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런저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미국 국제통화기금(IMF) 본사에서 파견 근무 중인 기재부 고위관계자는 “같이 일하는 부하 여직원이 야근해 격려 차원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밥값을 내겠다고 하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라”라며 “우리나라에 이런 문화가 정착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