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학순 “리비아식 해법에 발목잡힌 美..대북제재는 중러 통제 레짐”

김영환 기자I 2019.04.09 07:00:00

北에 리비아식 비핵화 해법 제시한 美, 교섭 수위 최고조로 높여 운신 폭 줄어
재선 선거 앞두고 협상 수준 낮추기 쉽지 않아..핵·미사일 유예 수준 노릴 것으로 전망
대북 제재 통해 중국과 러시아를 통제하는 메커니즘..北은 "제재-협상 양립안돼"

백학순 세종연구소장은 지난 5일 이데일리 본사에서 인터뷰를 갖고 북미 협상 교착 국면에 대해 “미국이 리비아식 해법을 북한에 제한하고 이를 공개하면서 정책에서 물러날 수 없게 된, ‘오디언스 코스트’가 발생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사진=노진환 기자)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베트남 하노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 회담으로 마무리된 이후 북미가 모두 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양측이 모두 공히 카드를 공개한 뒤 드러난 간극에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양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장은 이를 놓고 “교섭에 자승자박된 오디언스 코스트(audience cost)가 발생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대외정책이 국민들에게 공개돼 이를 바꾸려면 정치적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미다.

백 소장은 지난 5일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베트남에서 지속적으로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I’m not in a rush.)’라고 했는데 이는 미국 국내 오디언스(청중)에게 한 이야기”라며 “미국 국민들에게 (북한에 요구하는 사항을) 다 밝혀버렸는데 여기서 하나라도 물러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제재’를 대하는 북미의 입장 차이가 협상을 어렵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대북 제재를 중국과 러시아를 통제하는 매커니즘으로도 활용하는 반면, 북한은 제재는 미국내 대북 적대시 정책의 상징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봤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서 역할이 제한되는 배경을 ‘전시작전권’ 부재에서 찾았다. 미국과 북한 모두 협상 초기 우리로부터 중재를 받은 이후부터는 남한을 완전히 제외한 채 협상에 나서고 있다. 북미가 교착 상태에 접어들어야 우리 정부에게 다시 돌파구를 찾아달라 주문하는 제한적 역할만이 주어진다. 백 소장은 “북한과 미국은 우리가 한반도에서의 결정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리비아식 해법’ 공개한 美..스스로 운신폭 줄여

백 소장은 지난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북한에 리비아식 해법을 제시하고 이렇다할 협상도 진행하지 않은 채 결렬을 선택한 것이 북핵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큰 리스크로 작용하다고 있다고 분석했다. 리비아식 해법은 북한 내 모든 핵무기를 국외로 반출하고 이후에야 제재를 해제하는 방식을 뜻한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지난해 “리비아식 핵포기는 대화 상대방을 심히 자극하는 망발”이라고 비난했을 정도로 북한이 받기 힘든 카드다.

외교안보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트럼프 정부의 대북 정책이 ‘리비아식 해법’임을 대외적으로 드러낸 상황에서 이를 수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백 소장은 “당장 (재선)선거판이 시작되는데 (대북 정책 수위를 낮출 경우) 민주당에서 공격이 들어오지 않겠나”라며 “북미가 협상 내용들을 이야기 하지 않았어야 앞으로 협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 소장은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전까지 북한의 핵·미사일 동결만을 목표로 하고 있을 경우 한반도에 더욱 불투명한 미래가 전개될 것으로 봤다. 북한이 핵실험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만 하지 않더라도 군사적 긴장은 낮아지게 되고 이를 선거에서 자신의 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추후 북미 협상의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불신의 씨앗이 자리잡았을 가능성이 있다. 백 소장은 “미국이 제재 해제는 들어주지도 않고 리비아식 해법을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북한) 정권 교체와 다를 바 없다고 의심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그는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리비아식 해법을 요구하고 안되면 수준을 낮춰서 합의하려는 자세도 없이 워크아웃을 선언한 것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제재’에 대한 북미 인식 차이도 문제”

제2차 북핵 위기 당시 이를 타개하기 위해 북미는 한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를 포함해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을 도출했다. 그러나 그 직후 미국이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북한 계좌를 동결하면서 조심스럽게 피어나던 평화 분위기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북한이 ‘제재’를 대북 적대시 정책의 표상으로 여기는 한 사례다. 백 소장은 “북한은 ‘제재와 협상은 양립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협상은 상대방을 파트너로 하면서 진정성을 갖고 하는 것이지만 제재는 상대방을 죽이겠다는, 최소 평화 공존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며 “북한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제재 완화를 요구할 것이다. (하노이에서) 민생과 관련한 것(제재 해제)만 요구한 것도 같은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미국은 대북 제재가 북한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 완화를 주장하는 대표 국가가 중국과 러시아지만 결론적으로 미국 주도의 국제 대북 제재 공조가 유효한 상태다. 백 소장은 “실제 국제정치 핵심은 강대국 정치다. 강대국은 강대국 정치밖에 관심이 없다”며 “강대국 정치 하에서 미국은 대북 제재를 중국과 러시아를 통제하는 메커니즘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미 동맹 속에서도 미국이 철도 연결이나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교류를 막아서는 배경으로도 작동하고 있다. 백 소장은 “이걸 들어주면 물샐 틈 없는 통제 메커니즘으로 중국·러시아를 잡고 있는 데 금이 갈까봐 사전에 막는 것”이라며 “동북아 정치판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중국과 미국 사이의 무역 전쟁과 대북 제재 문제”라고 강조했다.

◇“전작권 없는 韓, 한반도 문제서 뒷전”

북핵 비핵화를 놓고 북미가 협상에 나서고 있지만 정작 한국 정부는 여기에서 배제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 사이를 오가며 중재 역할을 해냈지만 이후부터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이 없어지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한반도 문제에서 협상의 참여자가 되지 못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는 셈이다.

백 소장은 이 같은 문제의 배경에 전시작전통제권이 우리 손에 없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한반도에서 전쟁과 평화의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권이 우리에게 없다”라며 “우리 군대의 전작권을 갖고 있다면 모든 전쟁과 평화 문제를 다루는데 들어가서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를 넣어서 합의해야 한다”고 짚었다. 백 소장은 지난 싱가포르 제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 제안한 한미 합동 군사 훈련의 축소를 예로 들었다. 그는 “그걸 잘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대한민국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결정을 한 것이 사실”이라며 “(한미가) 동맹이라 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 이익에 따라 결정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라고 지적했다.

전작권이 없는 상황에서 주어진 역할이 중재자였다고 해도 아쉬운 점이 있다고 했다. 백 소장은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대한민국이) 당사자이기 때문에 모든 회담에 참여해야 한다고 처음부터 강력하게 포지셔닝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며 “그렇게 했다면 미국도, 북한도 우리 말을 들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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