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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국회, 예산 통과 기한부터 제대로 지켜야

조용석 기자I 2023.12.01 06:00:00

하연섭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하연섭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지난 9월 1일 정부는 전년대비 2.8% 증가한 656조 9000억원의 2024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를 부양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풀기 위한 고심이 엿보이는 예산안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중점 투자 분야로 약자복지 강화, 미래준비 투자, 양질의 일자리 창출, 국가의 본질적 기능 수행 뒷받침 등을 제시했지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을 포함해서 예산의 배분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최종결정하는 것은 국회의 몫이다.

그런데 예산 배분의 최종결정만큼 중요한 것이 예산을 제때 통과시키는 일이다. 우리나라 헌법에서는 국회가 새해 예산을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의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예산이 법정 기한인 12월 2일을 지켜 통과된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2년 국회법에 예산안 자동부의 규정을 신설,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예산안에 대한 심사를 11월 30일까지 마치지 못할 경우 그 다음 날에 위원회의 심사를 마치고 바로 본회의에 부의되도록 했다.

사실 국회에서 예산이 제때 통과되지 못한 이유는 대부분 예산안에 대한 깊이 있는 심의 때문이 아니다. 예산이 정치적 갈등의 볼모가 된 탓이 크다. 예산안 자동부의 제도가 도입된 직후에는 예산이 제때 통과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이 제도마저 무력화되는 듯하다. 국회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와 합의한 경우 예외가 인정돼 예산안이 본회의에 자동부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산이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통과돼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예산이 국회를 통과하고 나면 정부 부처로서는 예산 집행을 위한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정부가 당초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과 국회에서 최종적으로 통과된 예산은 규모와 용처 등이 달라지기 때문에 조정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행정부는 예산의 배정과 재배정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시간이 필요하다. 준비과정이 늦어지면 적기에 예산을 집행하기 어렵다. 이로 인한 피해는 예산 집행의 대상인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특히 정부 의존도가 높은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이 크다.

둘째,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의 살림살이는 중앙정부로부터의 지원에 의존하는 정도가 매우 큰 편이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 입장에서는 중앙정부로부터 내려오는 국고보조금의 규모 등이 정해진 이후에야 비로소 내년도 예산을 확정지을 수 있다. 국회에서 예산 통과가 지연되면 광역자치단체, 기초자치단체 순으로 예산 확정이 늦어져 국가 전체적으로 예산 운용의 적기성과 효율성이 낮아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행정적인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예산에 관련된 권한을 대리인인 국회가 심각하게 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시민이란 곧 납세자를 의미한다. 국민들이 납부하는 세금을 제대로 쓰는 것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무이고, 이를 감독할 책임을 국회가 지고 있다. 예산 통과 기한조차 지키지 못하는 국회는 국민들이 위임한 권한을 남용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 정치의 키워드는 ‘혁신’이다. 한국 정치의 혁신은 굳이 거창한 데서 찾을 이유가 없다.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예산에 관한 권한을 국민들을 두려워 하면서 제대로 사용하는 데에서부터 한국 정치의 혁신이 출발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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