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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호의 PICK]굴뚝 위 노동자는 바로 '나'

장병호 기자I 2020.05.11 05:35:00

재공연 오른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
지난해 연극계가 뽑은 최고 작품
파인텍 굴뚝농성 모티브로 무대화
'약속' 통해 노동 문제 현실 다뤄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송전탑, 망루, 전광판, 광고탑, 굴뚝 등 높은 곳에서 부당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목숨까지 내건 이들의 투쟁을 각자의 현실과는 무관한 이야기로 여긴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는 고공농성에 나선 노동자의 사연도 곧 우리의 이야기임을 말한다. 노동자들의 현실을 공감 가게 그려내 지난해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 월간 한국연극 ‘2019 공연 베스트7’에 나란히 선정됐다. 2019년 최고의 연극을 7개월 만에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의 한 장면(사진=연우무대).


작품은 최장기간 고공농성으로 기록된 파인텍 굴뚝 농성을 모티브로 한다. 부당한 정리해고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높이 75m에 달하는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426일간 벌인 고공농성이다. ‘인정투쟁; 예술가편’ ‘전화벨이 울린다’ 등 소수자의 삶을 무대에 올려온 이연주 작가가 대본을 쓰고 손배가압류 피해 노동자와 기지촌 여성 등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온 이양구 연출이 무대화했다.

고공농성이 모티브지만 작품에는 굴뚝 같은 높은 곳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의점을 통해 노동의 문제를 일상의 시선으로 다룬다. 주인공은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정화(이지현 분)다. 편의점 점장(백성철 분)은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열심인 정화를 ‘매니저님’이라 부르며 친절하게 대한다.

그러나 정화의 현실은 웃음과는 거리가 멀다. 7년 전 굴뚝 농성을 마치고 내려온 남편은 복직됐음에도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정화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습지 선생 선영(황순미 분)은 밀린 학습지 비용을 받고자 매일 같이 편의점을 찾아오지만 정화에게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한다. 여기에 정화의 남편과 함께 투쟁에 나섰던 명호(조형래 분), 밀린 임금을 받으려는 편의점의 전 아르바이트생 보람(정혜지 분)의 사연이 더해져 노동의 현실을 그려간다.

작품은 노동 문제를 거창하게 다루지 않는다. 대신 ‘약속’이라는 보편적인 테마로 풀어낸다. 다섯 인물 사이에 얽히고설킨 여러 약속은 매번 어긋나며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은 자신이 맺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은 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가. 그 답은 공연이 끝날 무렵 편의점 창문에 새겨지는 ‘근로계약법은 지켜라’라는 문구에 담겨 있다. 부당한 현실과의 싸움은 높이와 상관없는 것이다.

초연은 이연주 작가가 대표로 있는 극단 전화벨이 울린다 제작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번 재공연은 초연 당시 연우소극장을 대관해준 연우무대가 작품에 대한 연대의 의미에서 제작으로 참여했다. 배우들의 호흡이 좋다. 특히 정화 역을 맡아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표정을 소화한 배우 이지현의 연기가 인상에 남는다. 공연은 31일까지.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의 한 장면(사진=연우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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