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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의혹`, 사법부 수장서 피의자로…블랙리스트·재판거래 주도한 양승태

이승현 기자I 2019.01.11 06:11:00

[양승태 소환]법원 3차례 자체조사후 검찰수사 착수
수년간 법관 관리문건 작성 확인…양승태 등 수뇌부 결재
상고법원 청탁 위해 日강제징용자 소송결과 뒤집기 시도
`사법부 독립` 강조하며 스스로 훼손 지적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6월 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자택 인근에서 재임 시절 일어난 법원행정처의 ‘재판 거래’파문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이승현 기자] 지난 2017년 3월 대법원이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행사 저지를 거부한 한 판사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가했다는 의혹이 언론 보도로 제기됐다. 양승태(71) 전 대법원장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이후 3차례에 걸친 법원 자체 진상조사와 검찰의 강제수사 끝에 1년 11개월 만인 11일 양 전 원장은 헌정 사상 처음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청 포토라인 앞에 선다.

검찰은 양 전 원장을 사법농단 사태에서 단순히 아랫선에게 보고 받은 공범이 아니라 실제 지시하고 실행한 주범으로 보고 있다. 인사권으로 법관들을 길들이려 하고 헌법재판소와 검찰 등 유관기관 견제를 위해 내부 문서를 유출하도록 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특히 상고법원 도입이라는 숙원사업을 위해 국가 최고권력자인 대통령과 결탁해 사법부의 생명인 일선 재판의 독립성을 훼손한 정황까지도 속속 드러났다.

◇법관 길들이려 한 ‘제왕적’ 대법원장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사법부 블랙리스트 문건을 만들고 실제 실행했다”는 법조계 주변의 소문은 결국 조사 대상이 됐다. 법원은 △2017년 4월 진상조사위(1차) △2018년 1월 추가 조사위(2차) △2018년 5월 특별조사단(3차) 등 3차례에 걸쳐 자체 조사를 벌였다. 결론은 같았다. “일부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가 있지만 조직적인 법관 사찰과 인사 불이익은 없다”는 것. 2017년 9월 양 전 원장은 6년 임기를 마친 뒤 김명수(60) 대법원장이 부임했다.

이후 지난해 6월부터 본격화 한 검찰 수사는 재판 개입 의혹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다 수사 과정에서 검찰이 확보한 증거로 블랙리스트 의혹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법원의 연이은 영장기각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지난해 11월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을 압수수색해 2014~2017년 매년 작성된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 문건을 확보했다. 본래 이 문건은 음주나 금품수수 등 개인 비위가 있는 법관 명단을 정리한 것이다. 실제로는 상고법원 등 양승태 사법부 정책에 반대하거나 법원 내 특정 연구회 소속 판사들의 명단과 이들에 대한 불이익 조치 방안 등이 포함됐다.

특히 이들 문건에는 임종헌(60·구속기소) 전 법원행정처 차장-박병대(63)·고영한(64) 전 행정처장-양 전 원장 순으로 자필 서명이 기재돼 있다. 검찰은 이 문건이 양승태 사법부의 조직적인 법관 관리를 뒷받침하는 핵심 물증으로 보고 있다.

양 전 원장 시절 1차 자체조사단을 이끈 이인복(62) 전 대법관은 지난달 검찰에 나와 당시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문건을 제출받지 못했을 뿐 알고도 은폐한 건 아니라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명수 원장 시절인 2차와 3차 자체 조사에서도 이 문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검찰 관계자는 “(법원이) 손쉽게 밝힐 수 있었는데 1년 넘게 시간이 소모됐다. 왜 제대로 밝혀지 않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핵심 실무자로 지목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해 10월 28일 구속 후 첫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서울 서초구 중앙지검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상고법원` 위해 靑과 결탁…무리한 재판개입으로

상고법원 집착에 따른 무리한 재판 개입은 결국 양 전 원장의 발목을 잡았다. 김 원장 지시로 공개된 법원행정처 내부 문건을 보면 양 전 원장은 지난 2015년 8월 박근혜(67) 당시 대통령 독대 때 △통상임금 사건 △KTX 승무원 해고 사건 △콜텍 및 쌍용차 노동자 정리해고 사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시국선언 사건 등을 국정 협력사례로 제시했다. 3차 자체조사단은 “국정 협력 사례 판결은 정부가 좋아할 판결을 사후에 취합한 것이지 재판 자체에 개입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재판 개입의 실체가 서서히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2012년 5월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리자 당시 이명박 정부는 외교통상부를 통해 ‘대법원 판결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2013년 일본 기업 재상고로 다시 대법원에 올라왔지만,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돼 확정 판결이 날 수순이었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박근혜 정부는 다른 결과를 원했다. 실제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2013년과 2014년 유관기관 장관 등을 소집한 자리에 참석한 차한성(67)·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에게 강제징용 소송 지연과 결과 전환을 요구했다. 청와대 입장을 전해들은 양 전 원장이 직접 나섰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양 전 원장은 2015년 일본 기업 법률대리인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한모 변호사를 최소 3차례 만나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 전 원장은 또 재상고심 주심인 김용덕(62) 전 대법관에게 “판결이 확정되면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대법관은 담당 재판연구관에게 결과를 뒤집을 논리를 만들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은 2016년부터 전원합의체 회부 검토를 본격화 했지만 이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대통령 탄핵 등 일련의 사건으로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결국 재상고심에 올라온 지 5년 만인 지난해 10월 강제징용 피해자 측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결국 사법농단은 부친인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일본과 맺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반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을 막으려 한 박 전 대통령과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청와대의 도움이 절실했던 양 전 원장이 결탁한 데에서 비롯한 것으로 검찰은 판단하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7년 9월 퇴임사에서 “정치적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뤄낸 사법부의 독립은 무너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결국 사법부 독립에 대한 진정성을 평생 몸담았던 양 전 원장 자신이 법정에서 심판을 받을 처지가 됐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씨가 지난해 10월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뒤 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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