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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용익의 록코노믹스]경기 동향에 천당과 지옥 오간 '헤어메탈'

피용익 기자I 2018.04.28 08:08:08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2016년 1월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인기는 주인공 덕선이를 연기한 혜리(걸스데이)가 첫사랑을 떠올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곳곳에 등장하는 추억의 패션과 음악이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1988’이라는 숫자가 주는 특별한 의미가 드라마의 인기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만약 이 드라마가 1987이나 1989라는 숫자들 달고 나왔더라면 시청률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1988년은 실제로 특별한 해였다. 우리는 ‘쌍팔년’이란 애칭으로 그 해를 기억한다.

잠깐 역사를 되짚어보자. 1988년 9월17일, 제24회 하계 올림픽이 서울에서 역사적인 개막을 했다. 당시 한국을 찾은 외국인 수는 200만명을 돌파했다. 그렇게 많은 외국인이 방한한 것은 6.25 전쟁 이후 처음이란 얘기도 있다. 한국의 국제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6월 항쟁’의 결과 15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던 해이기도 하다.

모든 면에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던 시절이다. ‘흙수저’이니 ‘헬조선’이니 하는 자조적인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희망의 배경에는 경제가 있었다.

당시 한국은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3저 효과’에 힘입어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986년 12.2%, 1987년 12.3%, 1988년 11.7%로 3년 연속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서울 올림픽 개최로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실업률은 사상최저인 2.5%로 떨어졌다. 저성장과 청년실업이 문제로 떠오른 지금과는 대조적인 지표이다.

1980년대 후반 한국 경제의 호황은 세계 경제와 맥을 같이 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가 막바지에 이르고 평화가 지속되면서 미국은 안정적인 3~4%대 성장세를 나타냈다. 일본의 성장률은 1988년에 7%대에 달했고,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도 지금보다 훨씬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당시 세계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은 1920년대 이후 가장 호황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이즌
1980년대 후반의 글로벌 경제 호황은 문화 융성으로 이어졌다. 대중음악은 과거 저성장 시기에 억눌렸던 욕망을 표출하는 통로가 됐다. 대중은 반전(反戰)이나 저항보다는 자유와 쾌락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록 음악도 과거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던졌다.

머틀리 크루, 본 조비, 건즈 앤 로지스, 포이즌 등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밴드들은 따라부르기 쉬운 가사와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 정교하고 화려한 연주를 앞세워 차트 상위권을 점령했다. 노래 주제는 주로 여자와 술, 심지어 마약이었다. 이들의 음악 장르는 하드록에서 헤비메탈까지 다양했지만, 한껏 부풀린 헤어스타일 때문에 ‘헤어메탈’이라고 불렸다.

1988년 12월 마지막주 빌보드 핫100 차트를 보면, 1위에는 포이즌의 “Every Rose Has Its Thorn”, 7위는 건스 앤 로지스의 “Welcome To The Jungle”, 12위는 데프 레퍼드의 “Armageddon It” 등 헤어메탈 밴드들의 노래가 포진해 있다. 밴 헤일런, 본 조비, 화이트 라이언, 신데렐라, 빅슨 등의 노래도 100위 안에 들었다.

헤어메탈 밴드들은 마치 요즘 한국의 걸그룹이나 보이그룹처럼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언론은 헤어메탈 뮤지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하느라 바빴다. 누가 누구랑 술집에서 싸웠는데 누가 이겼다는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마저 관심거리가 됐다.

헤어메탈의 시대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바나가 등장했다. 라디오에는 “Smells Like Teen Spirit”이라는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헤어메탈과 달리 연주는 단순했고, 노래는 분노에 가득찼으며, 가사는 우울했다. 멤버들의 외모는 노숙자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도 대중은 이들의 음악에 매료됐다. 1992년 1월 11일, 이 곡이 수록된 너바나의 2집 ‘Nevermind’는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당시 최고 팝 스타였던 마이클 잭슨의 히트 앨범 ‘Dangerous’를 5주 만에 정상에서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대단한 화제가 됐다.

너바나
너바나의 혜성 같은 등장 이후 록 음악 시장의 판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화려한 연주를 들려주던 로스앤젤레스(L.A.) 중심의 ‘헤어메탈’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그대신 너바나와 펄 잼, 사운드 가든, 앨리스 인 체인즈, 스톤 템플 파일럿 같은 시애틀 중심의 그런지(grunge) 록이 메인스트림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사회에 대한 분노, 좌절, 소외 등의 정서를 단순한 연주에 담아냈다.

헤어메탈 밴드로 분류되는 신데렐라의 보컬리스트 톰 키퍼는 2017년 한 인터뷰에서 “모든 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런지가 등장하면서 전체 음악 업계가 변해버렸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헤어메탈을 몰락시킨 그런지 록의 갑작스러운 인기는 경제지표를 통해 해석해볼 수 있다. 경제 성장이 헤어메탈의 융성에 기여했듯이 그런지 록의 인기 배경에도 당시의 경제 상황이 있었다는 의미다.

1990년대 들어 세계 경제 성장률은 급격하게 둔화됐다. 1990년 미국의 성장률은 1.9%로 낮아졌고, 1991년에는 -0.1%를 기록하며 1982년 이후 9년 만에 처음으로 역(逆) 성장했다. 더 이상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쾌락을 추구할 수 없게 된 것은 물론이고, 당장 일자리를 찾기조차 어려워졌다. 너바나를 위시한 그런지 밴드들의 분노 어린 노래가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배경이 만들어진 셈이다.

음악 프로듀서인 제시 캐논은 2009년 칼럼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액슬 로즈(건스 앤 로지스)와 브렛 마이클스(포이즌)가 지저분한 당구대에서의 섹스를 노래하고 있을 때 에디 베더(펄 잼), 빌리 코건(스매싱 펌킨스), 커트 코베인(너바나)는 소외된 청년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상황들을 노래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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